Ver5.0 테니슨의 율리시스: 빅토리아 시대가 재해석한 영웅의 노년과 끝나지 않는 항해

테니슨의 율리시스: 빅토리아 시대가 재해석한 영웅의 노년과 끝나지 않는 항해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20년 만에 귀향한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원래 거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1833년 가을, 스물네 살의 영국 청년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은 이 노영웅을 다시 배에 태웁니다. 목적지는 "해 지는 너머, 서쪽 별들이 잠기는 곳". 고작 70행짜리 무운시(blank verse)가 어떻게 2,700년 된 신화를 비틀고, 한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 '노년의 출사표'가 되었는지 함께 따라가 봅니다.
1. 영웅의 "그 후"는 왜 궁금한가
그리스 신화의 영웅 서사는 대개 귀환(nostos)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디세우스(라틴어 이름 울릭세스 Ulixes, 영어로 율리시스 Ulysses)는 키클롭스, 키르케, 세이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칼립소의 섬을 거쳐 마침내 이타카로 돌아오고,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던 자들을 활로 쓸어버린 뒤 왕좌를 되찾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로 치면 시즌 피날레죠.
하지만 신화는 늘 '외전'을 낳습니다. 영웅이 돌아온 다음에는 무엇을 했을까? 늙은 전사는 평화로운 일상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고대부터 근대까지 세 개의 대답이 이어져 왔습니다. 하나는 호메로스가 예언의 형태로 남긴 대답, 또 하나는 중세 이탈리아의 단테가 지옥 한가운데서 들려준 대답, 그리고 마지막이 19세기 영국 테니슨의 대답입니다. 테니슨의 「율리시스」는 앞선 두 대답을 정교하게 엮어 짠 일종의 '리믹스'이면서, 동시에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의 불안과 야망을 실은 완전히 새로운 노래입니다.
이 글은 그 리믹스의 재료(원전), 제작 배경(작가의 상실과 시대 분위기), 구조와 문체, 그리고 해석 논쟁과 현대적 수용까지 차례로 해부합니다. 원문은 영어로 소개하고, 이해를 돕기 위한 우리말 풀이를 함께 붙였습니다.
2. 원재료 ①: 호메로스가 남긴 '예언된 노년'
『오디세이아』 제11권,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조언에 따라 저승의 입구로 가서 테바이의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혼령을 만납니다. 테이레시아스는 귀향의 험난함을 예고한 뒤, 그 '이후'까지 내다봅니다. 구혼자들을 처치하고 나면 오디세우스는 잘 다듬어진 노 하나를 어깨에 메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다를 전혀 모르고 소금 친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들의 땅에 이르러, 누군가 그 노를 보고 "어깨에 키(곡식 까부는 도구)를 메셨군요"라고 말하는 곳에서 포세이돈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마지막 대목에서 테이레시아스는 오디세우스의 죽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은 "바다로부터(혹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아주 부드럽게 찾아올 것이고, 그는 윤택한 노년에 지쳐 숨을 거두며 백성들은 그의 주위에서 번영하리라고요. 여기서 그리스어 표현 ex halos는 '바다에서 나와'와 '바다에서 떠나'로 모두 읽힐 수 있어서 고대부터 해석이 갈렸습니다. 이 애매함 덕분에, 오디세우스의 최후가 바다와 어떤 관계였는지는 후대 작가들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빈칸'으로 남았습니다.
오디세우스의 최후에 관해서는 『오디세이아』 이외에도 서사시권(Epic Cycle)의 『텔레고니아』 계열 전승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키르케와 오디세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텔레고노스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채 찔러 죽인다고 전해집니다. 즉 그리스 전통 안에서도 오디세우스의 노년은 하나로 정해진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본질적으로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칼립소가 불사의 몸을 주겠다고 해도 그는 거절하고 늙어가는 아내와 바위투성이 고향을 택합니다. 호메로스 버전의 그를 움직이는 엔진은 '향수(鄕愁)'입니다. 테니슨은 바로 이 엔진을 정반대 방향으로 돌려 끼웁니다.
3. 원재료 ②: 단테의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꽃
테니슨에게 훨씬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26곡입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 제8원의 여덟 번째 구렁, 곧 사기적 조언자들이 벌을 받는 곳에 이릅니다. 죄인들은 저마다 불꽃 속에 갇혀 있는데,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불꽃 하나 안에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함께 타고 있습니다. 트로이 목마 계략, 아킬레우스를 전쟁에 끌어들인 속임수, 팔라디온 신상 탈취 같은 '꾀'가 그들의 죄목입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요청에 오디세우스의 불꽃은 혀처럼 흔들리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키르케를 떠난 뒤 아들에 대한 애정도, 늙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도, 페넬로페를 기쁘게 해야 할 사랑도 "세상과 인간의 악덕과 가치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이기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몇 안 남은 늙은 동료들과 배 한 척으로 지중해 서쪽 끝, 인간이 넘어가지 말라는 경계 표시였던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짧은 연설(orazion picciola)"을 합니다.
fatti non foste a viver come bruti,
ma per seguir virtute e canoscenza." "그대들이 어떤 씨앗에서 났는지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앎을 좇기 위해 지어졌노라." — 단테, 「지옥편」 제26곡
동료들은 열광해 노를 젓고, 배는 해가 지는 쪽으로 다섯 달을 나아갑니다. 마침내 아득히 높은 검은 산(주석가들은 보통 연옥의 산으로 봅니다)이 보이는 순간, 거기서 일어난 회오리바람이 배를 세 번 돌려 바다 밑으로 삼켜 버립니다. "남이 원한 대로(com' altrui piacque)" 바다가 그들 위로 닫혔다는 마지막 문장은 섬뜩할 만큼 담담합니다.
단테에게 이 항해는 영광이면서 동시에 신이 정한 한계를 넘은 오만입니다. 연설의 수사는 감동적이지만, 그 연설을 하는 사람은 '말로 남을 움직이는 사기꾼'으로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 이중성, 즉 숭고함과 위험성이 한 몸에 있는 구조는 테니슨의 시에도 그대로 유전됩니다. 그래서 「율리시스」를 둘러싼 해석 논쟁의 씨앗은 사실 단테에게서 이미 뿌려졌던 셈입니다.
4. 1833년 가을, 스물네 살 시인에게 일어난 일
「율리시스」는 노인의 목소리로 쓰였지만, 쓴 사람은 젊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 시인은 인생 최대의 상실을 막 겪은 참이었습니다.
앨프리드 테니슨, 잉글랜드 링컨셔의 서머스비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진학. 토론 모임 '케임브리지 사도회(Apostles)'에서 아서 헨리 핼럼을 만나 평생의 벗이 됨. 핼럼은 테니슨의 누이 에밀리와 약혼.
시집 출간. 「연꽃 먹는 사람들(The Lotos-Eaters)」 수록. 일부 평단의 혹평으로 큰 상처를 받음.
핼럼이 빈(Vienna) 여행 중 뇌출혈로 22세에 급사.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율리시스」 집필. 같은 시기 「티토노스」의 초고(「티톤」), 그리고 훗날 『인 메모리엄』이 될 애가들도 쓰기 시작.
두 권짜리 『시집(Poems)』에 「율리시스」 첫 공개. 이 시집으로 시인으로서 명성을 확고히 함.
『인 메모리엄 A.H.H.』 출간. 같은 해 워즈워스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 임명.
사망.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코너'에 안장.
테니슨 자신이 이 시의 동기를 직접 밝혀 둔 것은 해석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의 아들 핼럼 테니슨이 펴낸 회고록에 기록된 시인의 말은 대략 이렇습니다.
즉 이 시는 겉으로는 그리스 영웅의 독백이지만, 속으로는 슬픔을 딛고 다시 살아가려는 젊은이의 자기 다짐이기도 합니다. 친구를 잃은 사람이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스스로를 다잡는 목소리를, 테니슨은 세상을 다 겪고 마지막 모험을 앞둔 노인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죠. 개인적인 애도를 신화의 가면 뒤에 숨겼기 때문에, 감정은 더 절제되고 오히려 더 보편적인 울림을 얻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시기에 쓴 「티토노스」와의 관계입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연인 티토노스는 불사를 얻었지만 영원한 젊음은 얻지 못해 끝없이 늙어가는 저주를 받은 인물입니다. 테니슨은 이 작품을 「율리시스」의 짝(pendant)이라고 불렀습니다. 한쪽은 죽음 직전까지 움직이려는 노인, 다른 쪽은 제발 죽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노인. 상실 직후의 시인은 "계속 나아갈 것인가, 멈춰서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두 개의 신화로 양면 촬영한 셈입니다.
5. 시의 구조: 70행, 세 개의 무대
「율리시스」는 약강 5보격 무운시(iambic pentameter blank verse), 즉 각운 없이 한 행에 '약-강' 리듬을 다섯 번 반복하는 영국 서사시의 정통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셰익스피어 희곡과 밀턴의 『실낙원』이 쓴 바로 그 형식입니다. 전체 70행은 청자와 어조가 바뀌는 지점에 따라 흔히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 비율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시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내면의 공간에서 시작해, 가족(아들)이라는 중간 지대를 짧게 거친 뒤, 동료와 바다라는 열린 공간으로 나아갑니다. 카메라가 왕궁의 어두운 실내에서 출발해 항구를 지나 수평선으로 '트래킹 숏'을 찍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선의 이동이 곧 결심의 진행입니다.
5-1. 첫 번째 무대(1~32행): "쓸모없는 왕"의 권태
By this still hearth, among these barren crags,
Match'd with an aged wife, I mete and dole
Unequal laws unto a savage race,
That hoard, and sleep, and feed, and know not me. 별 보람도 없구나, 할 일 없는 왕이
이 고요한 난롯가, 메마른 바위들 사이에서
늙은 아내와 짝지어, 거친 족속에게
공평치 못한 법을 재고 나눠 주는 일이란.
그들은 쌓아 두고, 잠자고, 먹을 뿐, 나를 알지 못한다. — 「율리시스」 1~5행
첫 문장부터 공기가 무겁습니다. "idle(할 일 없는)", "still(고요한)", "barren(메마른)", "aged(늙은)" 같은 형용사가 정체와 고갈의 이미지를 쌓아 올립니다. 백성을 묘사하는 "hoard, and sleep, and feed"는 동물적인 생존 활동만 나열해 단테의 "짐승처럼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를 거꾸로 비춥니다. 율리시스가 보기에 이타카는 살아 있되 의미 없는 삶의 무대입니다.
이어서 그 유명한 선언이 나옵니다.
Life to the lees. 나는 여행을 쉴 수 없다. 나는 삶을
그 앙금까지 마시리라. — 6~7행
"lees"는 포도주 통 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입니다. 삶의 맛있는 윗부분만 마시고 내려놓는 게 아니라, 쓴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들이켜겠다는 뜻이죠. 요즘 말로 하면 "인생 풀코스, 디저트 거부 불가"쯤 될까요. 그는 동료와 함께였을 때도, 홀로였을 때도 크게 즐기고 크게 고통받았다고 회상하며 "I am become a name(나는 이름이 되었다)"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살아 있는 전설,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버린 자의 자부심과 피로가 동시에 묻어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이 시의 철학적 심장이라 할 만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Yet all experience is an arch wherethro'
Gleams that untravell'd world whose margin fades
For ever and for ever when I move. 나는 내가 만난 모든 것의 일부다.
그러나 모든 경험은 하나의 아치,
그 너머로 아직 가 보지 않은 세계가 어른거리고
내가 나아갈 때마다 그 가장자리는 영원히, 영원히 멀어진다. — 18~21행
이 이미지는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치는 건축물이자 문입니다. 내가 겪은 경험들은 단단한 돌처럼 쌓여 아치를 이루지만, 그 아치는 결국 그 너머를 보여 주는 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너머의 지평선은 걸어갈수록 똑같이 물러납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향해 가는 상태' 자체가 삶이라는 생각, 이것은 낭만주의에서 빅토리아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진보관과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지식은 완성되지 않고 늘 확장된다는 근대 과학의 감각과도요.
곧이어 녹슮의 비유가 나옵니다. "How dull it is to pause, to make an end, / To rust unburnish'd, not to shine in use!(멈추고 끝내는 것은 얼마나 따분한가, 닦이지 않은 채 녹슬고, 쓰임 속에 빛나지 못하는 것은!)" 율리시스는 자신을 칼이나 무기에 빗댑니다. 쇠는 써야 빛나고, 쓰지 않으면 녹습니다. 그는 숨만 쉬는 것은 삶이 아니라고 말하며, 남은 시간 한 시간 한 시간이 "영원한 침묵"으로부터 건져 낸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져다줄 시간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에서 앎에 대한 갈망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Beyond the utmost bound of human thought. 가라앉는 별처럼 지식을 좇아,
인간 사유의 가장 먼 경계 너머로. — 31~32행
"가라앉는 별(sinking star)"은 서쪽 수평선으로 지는 별입니다. 쫓아가면 계속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대상. 앞선 '물러나는 지평선'의 이미지와 정확히 짝을 이루며, 단테의 오디세우스가 해 지는 쪽으로 항해한 경로를 은근히 떠올리게 합니다.
5-2. 두 번째 무대(33~43행): 아들 텔레마코스, 존중인가 하대인가
To whom I leave the sceptre and the isle,—
Well-loved of me, discerning to fulfil
This labour, by slow prudence to make mild
A rugged people, and thro' soft degrees
Subdue them to the useful and the good. 이 아이는 내 아들, 바로 나의 텔레마코스,
그에게 왕홀과 이 섬을 남긴다.
내가 몹시 아끼는 아이, 이 수고를 해낼 분별이 있어
더딘 신중함으로 거친 백성을 순하게 하고
부드러운 단계를 밟아
그들을 유익하고 선한 것에 길들일 것이다. — 33~38행
이 짧은 대목은 문학 수업에서 토론이 가장 뜨거워지는 부분입니다. 율리시스는 아들을 칭찬합니다. 성실하고, 신중하고, "공동의 의무라는 영역의 한가운데(centred in the sphere / Of common duties)"에 있으며, 집안의 신들을 공경할 줄 안다고요. 그런데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 묘합니다. "He works his work, I mine.(그는 그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한다.)"
한쪽 해석은 이것을 세대 간의 건강한 역할 분담으로 읽습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는 꾸준한 관리자가 필요하고, 탐험에는 모험가가 필요하다. 둘 다 존중받을 일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자질을 정확히 알아보고 믿고 맡긴다는 것이죠. 빅토리아 시대의 시각에서 보면, 텔레마코스는 제국 운영을 맡은 성실한 행정관, 율리시스는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탐험가에 대응합니다.
다른 해석은 어조에 숨은 미묘한 거리감과 경시를 짚어 냅니다. "blameless(흠잡을 데 없는)", "decent(점잖은)" 같은 칭찬은 열정이나 위대함이 아니라 '무난함'을 가리킵니다. 영웅의 입에서 나온 이 형용사들은, 어쩌면 "착하긴 한데 재미없는 녀석"이라는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읽든, 이 대목은 율리시스가 통치라는 공적 의무를 기꺼이 내려놓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이 이후 '책임 회피' 논쟁의 핵심 증거가 됩니다.
5-3. 세 번째 무대(44~70행): 항구, 그리고 마지막 출사표
There gloom the dark, broad seas. My mariners,
Souls that have toil'd, and wrought, and thought with me— 저기 항구가 있다. 배는 돛을 부풀리고,
저기 어둡고 넓은 바다가 침침하게 펼쳐져 있다. 나의 뱃사람들이여,
나와 함께 수고하고, 일하고, 생각해 온 영혼들이여— — 44~46행
여기서 청자가 바뀝니다. 율리시스는 이제 늙은 동료 선원들에게 말합니다. 연극 무대라면 조명이 바뀌고 문이 열리며 바닷바람이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자신이 모두 늙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반전을 겁니다.
Death closes all: but something ere the end,
Some work of noble note, may yet be done,
Not unbecoming men that strove with Gods. 노년에도 여전히 그만의 명예와 수고가 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닫는다. 그러나 그 끝이 오기 전에
무언가, 고귀하게 이름날 어떤 일을 아직 해낼 수 있으리라,
신들과 맞서 싸웠던 사내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리 없는 일을. — 50~53행
"신들과 맞서 싸웠던 사내들(men that strove with Gods)"은 『일리아스』에서 디오메데스가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에게 창을 겨눈 장면,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의 분노를 견디며 10년을 표류한 일 등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들은 신과 겨룬 세대라는 자부심을 공유하는 '전우'입니다.
그다음 54~56행에서 시의 풍경은 해 질 녘으로 물듭니다. 바위 위의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긴 하루가 저물며, 느린 달이 떠오르고, 깊은 바다가 여러 목소리로 신음합니다. 하루의 끝과 인생의 끝이 겹쳐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결정적 초대가 나옵니다.
'Tis not too late to seek a newer world.
Push off, and sitting well in order smite
The sounding furrows; for my purpose holds
To sail beyond the sunset, and the baths
Of all the western stars, until I die. 오라, 벗들이여,
새로운 세계를 찾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배를 밀어내라, 자리에 가지런히 앉아
울리는 물이랑을 내리쳐라. 내 뜻은 변함없으니,
해 지는 너머로, 서쪽 모든 별들이 몸을 담그는 곳 너머로
죽을 때까지 항해하리라. — 56~61행
"서쪽 별들의 목욕탕(the baths of all the western stars)"은 고대 그리스인의 우주관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대지를 둘러싼 거대한 강 오케아노스가 세상 끝을 흐르며, 별들이 지면 그 물속으로 잠긴다고 상상했습니다. 테니슨은 이 신화적 지리학을 그대로 빌려 와, 율리시스의 목적지를 지도 위의 장소가 아니라 세계의 가장자리 그 자체로 설정합니다.
그 끝에서 무엇이 기다릴까요? 율리시스는 두 가능성을 나란히 놓습니다.
It may be we shall touch the Happy Isles,
And see the great Achilles, whom we knew. 어쩌면 심연이 우리를 휩쓸어 삼킬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의 섬들에 닿아
우리가 알던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 — 62~64행
첫 번째 가능성은 단테의 결말, 곧 침몰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인 '행복의 섬들(Happy Isles)'은 그리스 신화의 축복받은 자들의 섬(마카론 네소이, Isles of the Blessed)을 가리킵니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은 영웅 시대의 일부 영웅들이 죽음 뒤 대지 끝 오케아노스 곁의 이 섬에서 근심 없이 산다고 노래했고, 핀다로스는 이곳에 아킬레우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시온 평원 전승과도 겹칩니다. 트로이에서 함께 싸웠던 아킬레우스를 "우리가 알던(whom we knew)"이라고 부르는 순간, 이 항해는 단지 탐험이 아니라 죽은 전우를 만나러 가는 길이 됩니다. 이 구절에서 많은 독자는 테니슨이 잃어버린 친구 핼럼을 떠올립니다. 죽은 벗과의 재회를 꿈꾸는 젊은 시인의 소망이 노영웅의 목소리 아래에서 조용히 울리는 것이죠.
그리고 영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결말이 옵니다.
We are not now that strength which in old days
Moved earth and heaven, that which we are, we are;
One equal temper of heroic hearts,
Made weak by time and fate, but strong in will
To strive, to seek, to find, and not to yield. 많은 것을 빼앗겼으나, 많은 것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지금은 옛날 땅과 하늘을 움직이던
그 힘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한결같이 단련된 영웅의 심장들,
시간과 운명에 약해졌으나 의지만은 굳세어
분투하고, 찾고, 발견하고, 결코 굴하지 않으리. — 65~70행
"temper"는 쇠를 담금질해 얻은 강도를 뜻하는 대장장이 용어입니다. 앞서 나온 '녹스는 쇠'의 비유가 여기서 '담금질된 강철'로 완성됩니다. 몸은 녹슬어 가도 의지는 강철처럼 단련되어 있다는 대비죠.
6. 소리로 읽는 「율리시스」: 운율이 만드는 노년의 리듬
이 시가 위대한 이유는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소리 내느냐에 있습니다. 테니슨은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귀'를 가진 시인으로 불렸고, 이 시에서도 운율로 의미를 연기합니다.
특히 1행의 "It little profits"는 의미상 강세가 'lit-'과 'prof-'에 실리면서 첫 단어부터 무거운 한숨처럼 들립니다. 반대로 56행의 "Come, my friends"는 짧고 단호한 명령으로 리듬의 전환점을 표시합니다. 한숨으로 시작해 구령으로 끝나는 구조, 그것이 이 시의 정서적 궤적입니다.
7. 극적 독백이라는 장치: "누가, 누구에게, 왜 말하는가"
「율리시스」는 영문학에서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극적 독백은 시인 자신이 아닌 특정 인물이, 특정 상황에서, 특정 청자를 향해 말하는 형식입니다. 독자는 그 말을 엿들으며, 화자가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무심코 드러내는 것 사이의 틈을 읽게 됩니다.
같은 1842년에 로버트 브라우닝은 「나의 전처 공작부인(My Last Duchess)」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의 화자인 공작은 자기 입으로 말하는 사이에 아내를 '처리'했다는 섬뜩한 사실을 흘립니다. 극적 독백의 묘미는 바로 이런 화자와 독자 사이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율리시스」를 읽을 때도 질문이 생깁니다. 이 노인의 웅변은 시인의 진심을 대변하는가, 아니면 독자가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봐야 할 한 인물의 자기 정당화인가?
「율리시스」의 청자 설정은 실제로 꽤 모호합니다. 1부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고(혼잣말처럼 들림), 2부는 아들을 "이 아이는"이라고 3인칭으로 소개하니 제3자에게 하는 말 같으며, 3부는 명확히 선원들을 향합니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이 시를 실제 연설의 기록이라기보다 여러 장면이 몽타주된 내면의 드라마로 보기도 합니다. 시점의 흔들림은 결점이라기보다, 결심이 내면에서 굳어져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담는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8. 빅토리아 시대가 이 노인을 사랑한 이유
「율리시스」가 1842년 발표 이후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에는 시대적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시기는 기술·제국·과학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는 동시에, 신앙과 확실성이 흔들리던 때였습니다.
또한 빅토리아 시대에는 토머스 칼라일 등이 설파한 '노동의 복음', 즉 일과 의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윤리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율리시스의 "쓰임 속에 빛나다(shine in use)", "노년에도 명예와 수고가 있다"는 대사는 이 윤리를 영웅적 언어로 승화시킨 것처럼 보입니다. 흥미롭게도 텔레마코스가 상징하는 '공동의 의무' 역시 같은 노동 윤리의 다른 얼굴입니다. 테니슨은 같은 시대정신을 두 인물로 쪼개 보여 준 셈입니다.
여기서 테니슨의 앞선 작품 「연꽃 먹는 사람들」(1832)과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이 시는 『오디세이아』 제9권에서 연꽃을 먹고 귀향 의지를 잃은 선원들을 다룹니다. 선원들은 "왜 우리만 끝없이 노동해야 하는가"라며 영원한 휴식을 갈망합니다. 몽롱하고 나른한 운율로 정체의 유혹을 노래한 작품이죠. 「율리시스」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같은 신화권에서 테니슨은 멈춤의 유혹과 전진의 의지를 모두 탐구했고, 시대는 결국 후자를 자신의 구호로 택했습니다.
「연꽃 먹는 사람들」 — 멈추고 싶은 자들의 노래 (휴식의 유혹)
「율리시스」 — 끝까지 움직이려는 노인의 노래 (전진의 의지)
「티토노스」 — 죽지도 못하고 늙어가는 자의 노래 (끝없는 노쇠의 저주)
「모래톱을 건너며」(1889) — 말년의 테니슨이 죽음을 바다로 나가는 항해에 빗댄 노래. 테니슨은 자신의 시집 마지막에 이 시를 두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9. 영웅의 노년, 무엇이 '재해석'되었나
제목의 핵심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테니슨은 그리스 영웅의 노년을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요? 세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비교 축 | 호메로스 | 단테 | 테니슨 |
|---|---|---|---|
| 노년의 의미 | 평온과 번영의 보상 | 노년에도 꺼지지 않는 욕망 | '아직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
| 집과 가족 | 삶의 궁극 목표 | 지식욕에 밀려난 애정 | 존중하지만 떠나야 할 일상 |
| 항해의 동기 | 신의 명령(제사) | 덕과 앎의 추구 | 앎 + 정체에 대한 거부 + 존재 증명 |
| 결말 | 부드러운 죽음 예언 | 회오리에 침몰 | 열린 결말(침몰 혹은 행복의 섬) |
| 도덕적 평가 | 지혜로운 귀환자 | 지옥의 사기적 조언자 | 찬양과 비판이 공존하는 모호함 |
첫째, 노년을 '쇠퇴'가 아니라 '미완'으로 바꿨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노년은 대체로 애처로운 시기입니다. 『일리아스』의 네스토르는 지혜롭지만 늘 젊은 날의 무용담을 되새기고,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잃고 무릎 꿇습니다. 테니슨의 율리시스는 몸의 쇠약을 인정하면서도(We are not now that strength), 노년을 생의 결말이 아니라 아직 쓰이지 않은 마지막 장으로 제시합니다.
둘째, 단테의 '죄'를 거의 지우고 '의지'만 남겼습니다.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신의 경계를 넘은 대가로 침몰합니다. 테니슨은 그 연설의 수사와 해 지는 항로를 거의 그대로 빌려 오면서, 지옥의 불꽃이라는 프레임과 신적 처벌을 빼 버립니다. 침몰은 "어쩌면"의 한 가능성일 뿐입니다. 중세의 경고담이 근대의 응원가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셋째, 영웅성을 '행위'에서 '태도'로 옮겼습니다. 고대 영웅은 무엇을 해냈느냐(트로이 함락, 괴물 퇴치)로 증명됩니다. 테니슨의 율리시스는 시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해내지 않습니다. 배는 아직 항구를 막 떠나려는 참입니다. 그의 영웅성은 성취가 아니라 "굴하지 않으려는 의지"라는 내면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적인 영웅관입니다. 결과보다 과정, 승리보다 불굴.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이 시를 '삶의 지침'처럼 암송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10. 해석 논쟁: 위대한 영웅인가, 무책임한 가장인가
20세기 이후 비평가들은 이 시를 마냥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극적 독백이라는 형식 자체가 화자를 의심할 여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쟁점을 살펴봅시다.
특히 페넬로페 문제는 오늘날 독자에게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오디세이아』에서 페넬로페는 20년 동안 구혼자들을 지혜롭게 따돌린, 남편과 대등한 꾀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런데 테니슨의 시에서는 이름조차 불리지 않고 "늙은 아내와 짝지어(Match'd with an aged wife)"라는 구절 하나로 지나갑니다. 페미니즘 비평은 이를 영웅 서사가 여성의 존재를 어떻게 배경으로 밀어내는지 보여 주는 예로 지적해 왔습니다. 현대에 페넬로페의 시점으로 『오디세이아』를 다시 쓰는 작품들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단테와의 연결은 아이러니 독해에 힘을 실어 줍니다. 테니슨처럼 단테를 깊이 읽은 시인이 지옥에서 타오르는 '사기적 조언자'의 연설을 모델로 삼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율리시스의 감동적인 말솜씨 자체가 독자를 '설득'하려는 장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원들을 사지로 이끄는 지도자의 웅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말부의 아름다움은 어딘가 서늘해집니다.
두 해석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 시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두 가지가 동시에 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리시스는 진심으로 용감하고, 동시에 이기적입니다. 그의 의지는 숭고하고, 동시에 위험합니다. 테니슨이 직접 밝힌 '나아가야 할 필요'라는 의도와, 극적 독백이라는 형식이 허용하는 비판적 거리가 한 텍스트 안에서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모호함이 바로 고전의 생명력입니다.
20세기 초 시인이자 비평가 T. S. 엘리엇은 테니슨에 관한 글에서 「율리시스」를 높이 평가했는데, 흔히 그가 이 작품을 "완벽한 시(a perfect poem)"라고 불렀다는 평가가 함께 전해집니다. 엘리엇은 테니슨의 사상보다는 압도적인 운율 감각과 감정의 깊이에 주목했습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테니슨의 진짜 위대함은 낙관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 밑에 깔린 깊은 우울을 아름다운 소리로 다스리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11. 바다를 건너 남극까지: 「율리시스」의 현대적 여정
이 시의 마지막 행은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새겨지고 인용된 시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몇 가지 굵직한 장면을 보면 이 노영웅이 얼마나 멀리 항해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12년 남극점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한 로버트 팰컨 스콧과 대원들을 기리기 위해, 남은 탐험대원들이 로스섬 옵저베이션 힐에 나무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거기 새겨진 문구가 바로 "To strive, to seek, to find, and not to yield"입니다. 극지 탐험이라는 빅토리아-에드워드 시대 탐험 정신의 마지막 장에 테니슨의 시가 비문으로 남은 셈입니다.
런던 올림픽 선수촌에는 이 마지막 행이 벽에 새겨져 선수들을 맞았습니다. 스포츠의 도전 정신을 상징하는 문구로 선택된 것입니다.
극 중 M(주디 덴치)이 청문회장에서 "Tho' much is taken, much abides..."로 시작하는 결말부를 낭송합니다. 시대에 뒤처졌다는 비판을 받는 노장 첩보원들과 기관을 변호하는 장면으로, 시의 '노년의 존엄'이라는 주제가 정확히 활용된 사례입니다.
영미권 학교의 대표적 암송 시이자 졸업식·추도식·정치 연설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학교와 단체의 표어로 쓰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인용될 때 대부분 마지막 한 행만 떼어 내 '긍정의 구호'로 쓴다는 사실입니다. 시 전체 맥락에서 그 행은 "시간과 운명에 약해졌으나"라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즉 젊은 패기의 함성이 아니라, 잃을 만큼 잃은 사람이 마지막 남은 의지를 끌어모으는 말입니다. 스콧 탐험대의 십자가에 새겨졌을 때 그 문구가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도, 바로 이 '상실 이후의 의지'라는 원래 맥락에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12. 지금 우리에게 이 노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령화 시대에 「율리시스」는 오히려 더 현재형인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 인생 2막, 'N잡'과 평생학습 같은 단어들이 일상이 된 지금, "노년에도 명예와 수고가 있다", "새로운 세계를 찾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구절은 19세기보다 더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옵니다. 퇴직 후 그동안 쌓은 기술과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나누려는 사람들, 예컨대 재능넷 같은 재능 공유 플랫폼에서 평생의 노하우를 다시 '쓰임 속에 빛나게' 하려는 시니어들의 모습은 녹슬기를 거부한 율리시스의 현대판 변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시는 경고도 건넵니다. 율리시스의 자아실현에는 대가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름 없이 남겨지고, 통치는 아들에게 넘겨지며, 동료들은 생사를 알 수 없는 바다로 이끌려 갑니다. 끝없는 자기 성장의 서사가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He works his work, I mine"이라는 말이 존중인지 단절인지 묻는 것은, 오늘날 일과 가족, 개인의 꿈과 공동체의 책임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는 상실 이후의 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물네 살의 테니슨은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슬픔에 잠겨 멈춰 버리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그 다짐을 늙은 영웅의 입을 빌려 말했기에, 이 시는 나이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잃어 본 모든 사람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빼앗겼으나, 많은 것이 남아 있다." 이 한 줄은 애도와 회복의 언어로서 지금도 유효합니다.
작품 — 앨프리드 테니슨, 1833년 10월경 집필, 1842년 『시집』 수록, 70행 무운시 극적 독백
원전 —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제11권 테이레시아스의 예언 + 단테 「지옥편」 제26곡의 마지막 항해
동기 — 벗 아서 헨리 핼럼의 급사(1833년 9월) 이후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
구조 — 내면의 독백(1~32) → 아들 소개(33~43) → 선원들을 향한 연설(44~70)
재해석 — 귀향의 영웅을 다시 떠나는 노인으로, 지옥의 죄인을 불굴의 탐구자로, 행위의 영웅을 태도의 영웅으로
논쟁 — 숭고한 의지의 찬가인가, 책임을 회피한 자기도취인가
유산 — 남극 스콧 탐험대 추모 십자가(1913), 런던 올림픽 선수촌(2012), 영화 「스카이폴」(2012)
13. 맺으며: 돛은 아직 부풀어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갔고,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테니슨의 율리시스는 그 어느 쪽에도 도착하지 않습니다. 시가 끝나는 순간에도 배는 막 항구를 떠나려 하고, 노는 이제 막 "울리는 물이랑"을 내리치기 시작합니다. 그가 행복의 섬에 닿았는지, 심연에 삼켜졌는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테니슨이 신화에 더한 가장 근대적인 한 수일지도 모릅니다. 결말을 열어 둠으로써, 이 항해는 시 속 노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 각자의 것이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그 배에 제국과 과학의 꿈을 실었고, 남극의 탐험대원들은 잃어버린 동료에 대한 추모를 실었으며, 오늘의 독자는 각자의 상실과 다음 장(章)에 대한 기대를 싣습니다. 2,700년 전 이타카의 바위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오라, 벗들이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To strive, to seek, to find, and not to yield."
분투하고, 찾고, 발견하고, 결코 굴하지 않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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