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5.0 벤틀리 뮬리너(Mulliner) — 마차 공방에서 시작된 영국 최고(最古) 코치빌더의 계보와 현재

벤틀리 뮬리너(Mulliner) — 마차 공방에서 시작된 영국 최고(最古) 코치빌더의 계보와 현재
“200년 된 영국 코치빌더”라는 표현은 사실 겸손한 축에 속합니다. 뮬리너 가문의 마차 제작 이력은 1760년 노샘프턴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벤틀리는 그 뿌리를 더 앞선 16세기 가문의 마구(馬具) 공방까지 연결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코치빌더”라고 소개합니다.
말이 끌던 우편 마차에서, 르망을 달리던 블로워, 전 세계 12대뿐인 바칼라와 18대뿐인 바투르까지. 이 글은 한 이름이 어떻게 수백 년 동안 ‘맞춤 제작’이라는 기술을 지켜 왔는지, 그리고 지금 영국 크루(Crewe) 공장 안에서 그 이름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따라가 봅니다.
01‘코치빌더’라는 단어부터 풀어 보자
오늘날 자동차 회사는 엔진·변속기·섀시·차체·실내를 한 지붕 아래에서 모두 만듭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까지 고급차 시장은 전혀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롤스로이스나 벤틀리 같은 제조사는 주로 ‘롤링 섀시’, 즉 엔진과 변속기, 프레임, 서스펜션, 바퀴까지만 달린 ‘움직이는 뼈대’를 팔았고, 그 위에 올라갈 차체(body)는 고객이 따로 고른 전문 공방에서 만들었습니다. 이 공방을 코치빌더(coachbuilder)라고 부릅니다.
이름에 ‘코치(coach)’가 들어간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들 대부분이 원래 말이 끄는 마차(coach)를 만들던 장인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무 골격을 짜고, 그 위에 패널을 씌우고, 도장과 가죽·직물 마감까지 해내는 기술은 엔진이 말을 대신한 뒤에도 그대로 쓸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후퍼(Hooper), 파크 워드(Park Ward), 반덴 플라(Vanden Plas), 그리고 뮬리너(Mulliner) 같은 이름들은 마차 시대에서 자동차 시대로 자연스럽게 건너왔습니다.
코치빌딩 = 제조사가 만든 기계적 뼈대 위에, 별도 장인이 고객 주문대로 차체와 실내를 ‘맞춤 제작’하는 방식.
양복으로 치면 기성복이 아니라 비스포크 테일러링이고, 건축으로 치면 골조 위의 인테리어·외관 설계를 통째로 맡는 셈입니다.
이 방식이 쇠퇴한 가장 큰 이유는 기술 변화였습니다. 1950~60년대 들어 프레임과 차체가 한 몸이 되는 모노코크(일체형 차체) 구조가 확산되면서, “뼈대만 사서 몸통은 따로 맞춘다”는 공식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차체가 곧 구조물이 되니 아무나 손댈 수 없게 된 것이죠. 수많은 독립 코치빌더가 문을 닫거나 제조사에 흡수됐고, 뮬리너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제조사 내부 조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덕분에, 이름이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02뮬리너 가문의 시간표: 마구 공방에서 우편 마차까지
뮬리너라는 이름의 출발점은 잉글랜드 중부 노샘프턴(Northampton)입니다. 이 도시는 예로부터 가죽 산업, 특히 구두와 마구 제작으로 유명했습니다. 벤틀리는 뮬리너의 기원을 16세기 가문의 마구·안장 제작 이력에서 찾고, 오늘날에도 브랜드를 소개할 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코치빌더의 계보”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업체로서의 코치빌딩 역사가 비교적 분명하게 이야기되는 시점은 1760년입니다. 이 해에 프랜시스 뮬리너(Francis Mulliner)가 노샘프턴에서 마차 제작 사업을 시작했고, 가문은 이후 마차, 특히 장거리 교통·우편과 연계된 마차의 제작과 정비로 명성을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도로망과 역마차 체계가 빠르게 정비되던 시기였고, 튼튼하면서도 승차감이 좋은 마차를 만드는 능력은 곧 오늘날의 ‘모빌리티 엔지니어링’ 역량이었습니다.
① 목재 프레임 기술 — 초기 자동차 차체는 물푸레나무(ash) 등 단단한 목재로 골격을 짜고 금속판을 씌우는 방식이 흔했습니다.
② 판금·성형 — 알루미늄이나 강판을 손으로 두드려 곡면을 만드는 기술.
③ 도장 — 여러 겹을 칠하고 연마하는 깊이 있는 마감.
④ 트림(실내 마감) — 가죽, 직물, 스티칭. 노샘프턴의 가죽 전통과 직결되는 영역입니다.
가문은 시간이 흐르며 여러 갈래로 나뉩니다. 노샘프턴에는 아서 뮬리너(Arthur Mulliner) 계열의 회사가, 버밍엄에도 뮬리너 이름을 쓴 회사가 있었고, 런던에서는 헨리 저비스 뮬리너(Henry Jervis Mulliner)가 1897년 H.J. 뮬리너(H.J. Mulliner & Co.)를 세웁니다. 오늘날 벤틀리 뮬리너로 이어지는 가장 직접적인 줄기는 바로 이 런던의 H.J. 뮬리너입니다. 같은 성(姓)을 쓰지만 별개의 회사들이 공존했다는 점은 자동차 역사 자료를 읽을 때 자주 헷갈리는 부분이니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03한눈에 보는 연대기
뮬리너 가문의 마구·안장 제작 이력. 벤틀리가 브랜드 계보의 시작점으로 소개하는 시기.
프랜시스 뮬리너, 노샘프턴에서 마차 제작업 시작. ‘코치빌더 뮬리너’의 실질적 출발점.
헨리 저비스 뮬리너, 런던에 H.J. 뮬리너 설립. 자동차 시대 고급 차체 제작으로 명성.
W.O. 벤틀리가 벤틀리 모터스 설립. 초기 벤틀리들은 롤링 섀시로 판매되어 코치빌더가 차체를 얹음.
뮬리너 계열 코치빌더들이 벤틀리 섀시에 차체를 제작하며 인연 시작. 벤틀리는 1923년을 뮬리너 차체 벤틀리의 시작으로 언급해 왔음.
롤스로이스가 벤틀리 인수. 이후 두 브랜드는 오랫동안 한 지붕 아래 성장.
벤틀리 R-타입 컨티넨탈 등장. H.J. 뮬리너의 패스트백 차체로 ‘전설의 GT’가 됨.
롤스로이스가 H.J. 뮬리너 인수.
이미 롤스로이스 산하였던 파크 워드와 통합, 뮬리너 파크 워드(Mulliner Park Ward) 출범.
폭스바겐 그룹이 벤틀리와 크루 공장 인수. 뮬리너 명칭은 벤틀리 쪽에 남음.
뮬리너를 클래식·코치빌트·컬렉션 3개 축으로 재편. 바칼라·블로워 컨티뉴에이션 시리즈 공개.
바투르 공개, 스피드 식스 컨티뉴에이션 시리즈 진행. 이후 바투르 컨버터블 등으로 코치빌트 라인 확장.
04벤틀리와 뮬리너가 만난 시대: ‘벤틀리 보이즈’의 그늘 아래
W.O. 벤틀리(Walter Owen Bentley)가 1919년 세운 벤틀리 모터스는 처음부터 성능과 내구성으로 승부한 브랜드였습니다. 1920년대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벤틀리는 1924년, 그리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연속으로 우승하며 이름을 떨쳤고, 이 차들을 몰던 부유하고 대담한 드라이버 무리는 ‘벤틀리 보이즈(Bentley Boys)’라 불렸습니다.
당시 벤틀리를 사는 고객 다수는 섀시를 구입한 뒤 자신이 신뢰하는 코치빌더에 차체를 맡겼습니다. 똑같은 3리터나 4½리터 섀시라도 누구 손을 거쳤느냐에 따라 오픈 투어러가 되기도, 우아한 살롱이 되기도, 가벼운 레이싱 바디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 뮬리너 계열 코치빌더들은 벤틀리 섀시에 차체를 얹는 단골 파트너 중 하나였습니다. 즉 “벤틀리 뮬리너”는 브랜드가 나중에 만든 마케팅 조합이 아니라, 100년 전 실제 공방과 공방 사이의 협업에서 시작된 관계입니다.
코치빌딩 시대의 자동차는 오늘날의 맞춤 정장처럼, 한 대 한 대가 주인의 성격을 닮았다.
1931년 대공황의 여파 속에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에 인수되고, 생산 기반은 이후 체셔주 크루(Crewe)로 옮겨 갑니다. 크루 공장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항공기 엔진 생산을 위해 세워진 시설이었고, 전후 롤스로이스·벤틀리 자동차 생산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뮬리너가 일하는 곳도 바로 이 크루입니다.
05R-타입 컨티넨탈: 뮬리너 이름을 영원히 새긴 패스트백
뮬리너의 자동차 역사를 한 대로 요약하라면 많은 전문가들이 1952년 벤틀리 R-타입 컨티넨탈을 꼽습니다. 당시 이 차는 ‘가장 빠른 4인승 차’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그 비결의 상당 부분이 H.J. 뮬리너가 만든 경량 패스트백 차체였습니다.
R-타입 컨티넨탈은 지붕선이 뒤로 길게 흘러내리는 실루엣, 뒤쪽 펜더의 근육질 곡선, 그리고 공기 흐름을 의식한 형상으로 유명합니다. 풍동 실험을 활용해 다듬었다는 설명이 전해지며, 무게를 줄이기 위해 알루미늄 차체를 사용했습니다. 무거운 차체를 장식하는 대신 ‘가볍고 매끈해서 빠른 고급차’라는 개념을 실현한 셈입니다.
R-타입 컨티넨탈은 벤틀리 ‘컨티넨탈’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원형입니다. 2003년 등장한 현대의 컨티넨탈 GT가 디자인에서 뒤쪽 ‘파워 해치(power haunch)’라 불리는 리어 펜더 근육선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시대의 실루엣을 계승한 것입니다. 뮬리너가 그린 선 하나가 70년 넘게 브랜드 디자인 언어로 살아 있는 셈이죠.
그 밖에도 H.J. 뮬리너는 1950~60년대 벤틀리 S 시리즈 등에 독특한 차체를 제작했고, 뮬리너 파크 워드 시절에는 롤스로이스·벤틀리의 쿠페·컨버터블 등 소량 고급 모델 제작을 맡았습니다. 대량생산 체제에서 ‘손이 많이 가는 차’를 담당하는 전문 조직, 이것이 뮬리너가 제조사 안으로 들어가 찾은 새 역할이었습니다.
06흡수, 분리, 그리고 남겨진 이름
1959년 롤스로이스는 H.J. 뮬리너를 인수했고, 1961년 이미 산하에 있던 파크 워드와 합쳐 뮬리너 파크 워드를 만듭니다. 모노코크 차체가 표준이 되어 가던 시기, 독립 코치빌더로 버티기 어려운 환경에서 제조사 내부의 ‘비스포크 부서’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1998년, 자동차 업계 최대의 드라마 중 하나가 펼쳐집니다. 비커스(Vickers)가 소유하던 롤스로이스 모터 카스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폭스바겐 그룹이 크루 공장과 벤틀리 브랜드 등을 인수했지만, ‘롤스로이스’ 자동차 브랜드 사용권은 BMW가 확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2003년부터 롤스로이스는 BMW 산하로 영국 굿우드에서, 벤틀리는 폭스바겐 산하로 크루에서 생산되는 구조가 됐습니다.
이 분리 과정에서 크루에 있던 뮬리너 조직과 이름은 벤틀리 쪽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뮬리너”라는 이름을 단 신차는 벤틀리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롤스로이스는 자체적으로 ‘비스포크’와 ‘코치빌드’ 부서를 운영하며 다른 길을 걷고 있지요. 한때 한 지붕 아래 있던 두 브랜드가 각자의 방식으로 ‘초고가 맞춤 제작’ 경쟁을 벌이는 셈입니다.
벤틀리 뮬리너
폭스바겐 그룹 산하. 크루 공장 내 비스포크·코치빌트 전담 조직. 클래식·코치빌트·컬렉션 3축 운영.
롤스로이스 비스포크/코치빌드
BMW 그룹 산하. 2003년 이후 굿우드 신공장 체제. 독자적인 초고가 코치빌드 프로젝트 운영.
07오늘의 뮬리너: 세 개의 기둥
2020년 무렵 벤틀리는 뮬리너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 세 개의 포트폴리오로 재정리했습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뮬리너”라는 배지가 붙은 차들이 왜 가격도, 생산량도, 성격도 제각각인지 단번에 이해됩니다.
🏁 뮬리너 클래식
과거의 명차를 원래 사양에 충실하게 다시 만드는 컨티뉴에이션 시리즈와 역사적 차량 복원. 블로워, 스피드 식스가 대표 사례.
✒️ 뮬리너 코치빌트
기존 모델을 기반으로 차체 디자인까지 새로 만드는 초소량 한정판. 바칼라(12대), 바투르(18대) 등.
🎨 뮬리너 컬렉션
양산 모델에 뮬리너 전용 사양과 개인화 옵션을 더한 라인. 컨티넨탈 GT·플라잉스퍼·벤테이가 뮬리너 등.
쉽게 비유하자면, 클래식은 ‘박물관의 복원가’, 코치빌트는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컬렉션은 ‘고급 맞춤 테일러’입니다. 세 영역 모두 공통적으로 크루 공장의 숙련 장인들, 디자인팀, 엔지니어링팀의 협업으로 굴러갑니다. 이제 하나씩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08뮬리너 클래식: 90년 전 레이스카를 ‘새로’ 만든다는 것
블로워 컨티뉴에이션 시리즈
‘블로워(Blower)’는 슈퍼차저를 단 4½리터 벤틀리의 별칭입니다. 1920년대 말, 벤틀리 보이즈의 한 명인 팀 버킨(Sir Henry ‘Tim’ Birkin)은 기존 4½리터 엔진에 슈퍼차저를 더해 더 높은 출력을 노렸고, 그렇게 탄생한 ‘팀 블로워’ 레이스카들이 1929~1930년 무렵 르망 등 레이스 무대에 섰습니다. 흥미롭게도 창업자 W.O. 벤틀리 본인은 과급보다 배기량을 키우는 쪽을 선호해 슈퍼차저 방식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레이스 성적만 보면 블로워는 내구성 문제로 큰 우승을 거두지 못했지만, 앞에 툭 튀어나온 거대한 슈퍼차저와 압도적인 존재감 덕분에 벤틀리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차 중 하나가 됐습니다.
뮬리너 클래식은 2019~2020년 블로워 컨티뉴에이션 시리즈 12대 제작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핵심은 벤틀리가 보유한 원조 팀 블로워 중 한 대(‘팀 카 2호’, 섀시 번호 HB 3403)를 통째로 분해해 모든 부품을 측정·스캔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 차를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현대적인 3D 스캐닝과 디지털 도면 기술로 수십 년 된 부품의 형상을 기록하고, 원래의 공법과 재료를 최대한 따라 재현하는 작업이었죠. 먼저 시제차 격인 ‘카 제로(Car Zero)’를 만들어 시험 주행으로 검증한 뒤 고객용 12대를 제작했습니다.
이 차들은 ‘레플리카(모조품)’가 아니라 제조사가 직접 원래 사양으로 이어 만든다는 의미에서 ‘컨티뉴에이션(연속 생산)’이라 부릅니다. 다만 현대 공도 안전·배출 규제를 만족하는 신차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수집과 트랙·이벤트 주행을 염두에 둔 성격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달릴 수 있는 역사 문서’에 가깝습니다.
스피드 식스 컨티뉴에이션 시리즈
블로워가 ‘상징’이라면 스피드 식스(Speed Six)는 ‘실적’입니다. 6.5리터 직렬 6기통 기반의 스피드 식스는 1929년과 1930년 르망을 연속 제패하며 벤틀리 보이즈 시대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뮬리너 클래식은 블로워 이후 두 번째 컨티뉴에이션 프로젝트로 스피드 식스를 선택했고, 역시 12대를 제작하는 계획으로 진행했습니다. 1929년 르망 우승 팀 카 등을 참고해 레이스 사양을 재현했으며, 시제차 ‘카 제로’의 주행 시험을 거쳐 고객 인도에 들어갔습니다.
이 프로젝트들은 한편으로 기술 보존이라는 의미도 큽니다. 1920년대 방식의 리벳, 목재와 직물을 활용한 차체 구조, 기계식 브레이크와 같은 요소를 실제로 제작해 보는 경험은 장인의 손에서 손으로 기술을 넘기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됩니다. 문서와 사진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손의 감각을 재현 작업을 통해 다시 몸에 익히는 것이죠.
09뮬리너 코치빌트: 바칼라와 바투르
현대 뮬리너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린 것은 코치빌트 라인입니다. 기존 양산차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바탕으로 하되, 외관 패널과 실내를 새로 디자인해 극소수만 만드는 방식입니다. 20세기 코치빌딩 정신을 21세기 기술로 되살린 형태라고 할 수 있죠.
바칼라(Bacalar, 2020)
2020년 공개된 뮬리너 바칼라는 1990년대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벤틀리가 ‘완전한 코치빌트 신차’를 선보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3세대 컨티넨탈 GT 컨버터블을 기반으로 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차체 패널 대부분을 새로 만들었고, 고정식 지붕이 없는 2인승 바르케타(barchetta) 형태를 택했습니다.
파워트레인은 6.0리터 W12 트윈터보로, 최고출력 659PS, 최대토크 900Nm 수준이 발표됐습니다. 생산량은 12대, 그리고 공개 시점에 이미 모두 주인이 정해진 상태였습니다. 가격은 영국 기준 약 150만 파운드 안팎(세전)으로 보도됐습니다.
바칼라를 상징하는 디테일은 ‘리버우드(Riverwood)’입니다. 영국 동부 늪지(펜스) 지역에서 발굴된, 약 5,000년 동안 묻혀 있던 고목을 실내 장식재로 쓴 것입니다. 오랜 세월 물과 흙 속에서 변성된 나무는 독특한 어두운 결을 띠며, 이를 가공해 실내에 넣었습니다. 여기에 와인 양조 과정의 부산물인 포도 껍질 등을 활용한 마감재, 지속가능한 소재를 쓴 가죽 처리 같은 요소도 소개됐습니다. 럭셔리를 ‘희소성’과 ‘이야기’, 그리고 ‘지속가능성’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였죠.
바투르(Batur, 2022)
2022년 미국 몬터레이 카 위크 기간에 공개된 뮬리너 바투르는 바칼라의 다음 장입니다. 이번에는 지붕이 있는 2+2 성격의 패스트백 쿠페였고, 생산량은 18대로 정해졌습니다. 이 역시 공개 시점에 판매가 완료된 것으로 발표됐습니다. 가격은 약 165만 파운드(세전)부터로 보도됐습니다.
바투르에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능. W12 엔진의 흡기·배기·터보 시스템을 손봐 최고출력 740PS, 최대토크 1,000Nm를 냈고, 발표 당시 벤틀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엔진으로 소개됐습니다. 벤틀리가 W12 생산을 마무리하는 시기와 맞물려, 바투르는 사실상 W12의 ‘최종 진화형’ 중 하나라는 상징성도 얻었습니다.
둘째, 디자인 언어. 벤틀리는 바투르의 길고 낮은 보닛, 수직적으로 서 있는 그릴, 새로운 형태의 헤드램프와 리어 라이트 그래픽이 향후 벤틀리 전기차 디자인의 방향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바투르는 단순한 한정판이 아니라 ‘미래 벤틀리의 얼굴’을 시험하는 무대였던 셈입니다. 또한 실내 일부 장식 부품을 18캐럿 금을 3D 프린팅해 만드는 옵션을 제공해 화제가 됐습니다. 최첨단 적층 제조와 귀금속 공예가 만난 사례입니다.
바투르는 천연 섬유 기반 복합소재를 일부 외장 부품 옵션으로 제시했고, 벤틀리는 전통 가죽 대신 고를 수 있는 소재와 저탄소 가죽 공정 등을 함께 소개했습니다. 수백 년 전 마차 장인이 그 시대 최고의 나무와 가죽을 골랐듯, 오늘의 뮬리너는 ‘환경적 정당성’까지 갖춘 재료를 고르는 것이 과제가 됐습니다.
바투르 컨버터블과 그 이후
바투르의 성공 이후 벤틀리는 지붕을 여는 바투르 컨버터블을 추가로 선보였고, 이 역시 극소량 한정 생산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바칼라(오픈) → 바투르(쿠페) → 바투르 컨버터블(오픈)로 이어지는 흐름은, 뮬리너 코치빌트가 1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정기적인 ‘작품 라인업’으로 자리 잡았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 모델 | 공개 | 형태 | 파워트레인(발표 기준) | 생산 |
|---|---|---|---|---|
| 바칼라 | 2020 | 2인승 바르케타 | 6.0 W12 트윈터보 · 659PS · 900Nm | 12대 |
| 바투르 | 2022 | 패스트백 쿠페 | 6.0 W12 트윈터보 · 740PS · 1,000Nm | 18대 |
| 블로워 컨티뉴에이션 | 2020~ | 1920년대 레이스카 재현 | 슈퍼차저 4½리터 직렬 4기통 | 12대 + 카 제로 |
| 스피드 식스 컨티뉴에이션 | 2021~ | 1929년 르망 사양 재현 | 6½리터 직렬 6기통 | 12대 + 카 제로 |
10뮬리너 컬렉션: 양산차를 ‘내 차’로 만드는 기술
코치빌트가 1년에 몇 대 나오는 ‘작품’이라면, 컬렉션은 뮬리너라는 이름을 훨씬 더 많은 고객이 경험하게 해 주는 영역입니다. 컨티넨탈 GT, 컨티넨탈 GTC, 플라잉스퍼, 벤테이가 등 주요 양산 모델에 ‘뮬리너’ 트림을 두고, 전용 휠, 전용 그릴 패턴, 다이아몬드 퀼팅 시트, 고급 오디오, 확장된 색상·소재 선택지 등을 제공합니다.
대표적인 시그니처가 ‘다이아몬드 인 다이아몬드(Diamond-in-Diamond)’ 퀼팅입니다. 시트 가죽에 다이아몬드 패턴을 새기고, 그 안에 다시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의 스티칭을 넣는 방식으로, 한 시트 안에 수많은 바늘땀이 정교하게 배치됩니다. 바느질 하나가 어긋나면 패턴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자동화 장비와 숙련공의 검수가 함께 필요합니다. 노샘프턴 마구 장인의 가죽 기술이 오늘날 이런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꽤 낭만적이죠.
🎨 외장
방대한 페인트 선택지, 고객이 가져온 샘플에 맞춘 색 조색, 투톤·손그림 코치라인, 전용 휠 디자인.
🪵 실내
가죽 컬러 조합, 다양한 우드 베니어와 카본·금속 마감, 퀼팅·자수 패턴, 맞춤 엠블럼.
✨ 특별 주문
개인 이니셜, 가문 문장, 반려동물 실루엣 자수 등 고객 스토리를 담은 디테일. 가능 범위는 안전·품질 검증을 거쳐 결정.
또한 컬렉션 영역에서는 벤테이가 EWB(롱 휠베이스) 뮬리너처럼 뒷좌석 경험에 초점을 맞춘 사양도 운영됩니다. 벤테이가 EWB에는 탑승자의 자세와 체온 등을 고려해 시트를 조정하는 ‘에어라인 시트’ 개념이 소개됐는데, 이는 과거 쇼퍼 드리븐 리무진을 만들던 코치빌더의 역할이 현대적으로 진화한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블랙 크롬 등 어두운 톤의 외장 마감을 적용한 ‘뮬리너 블랙라인’ 같은 사양 패키지도 젊은 고객층을 겨냥해 마련됐습니다.
11크루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 비스포크의 작업 흐름
그렇다면 뮬리너 주문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까요? 세부 절차는 차종과 요청 범위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공개된 흐름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담·브리핑
딜러 또는 크루 방문을 통해 고객의 취향, 용도, 영감(그림·소재·장소)을 공유.
디자인 제안
디자이너가 렌더링·컬러 보드·소재 샘플로 구체화. 실물 샘플로 색감 확인.
엔지니어링 검증
소재의 내구성, 내열·내광성, 안전 규정 적합성(에어백 전개 경로 등) 검토.
제작·조립
도장, 우드 가공, 가죽 재단·스티칭을 장인이 수행하고 양산 라인과 연계해 조립.
품질 검수·인도
최종 검수 후 인도. 코치빌트 모델은 인도 세리머니 자체가 하나의 이벤트.
여기서 핵심은 3단계입니다. 현대 자동차의 실내는 단순한 장식 공간이 아니라 에어백, 센서, 열 관리, 전자 장비가 얽힌 정밀 구조물입니다. 예컨대 대시보드에 특수한 나무나 금속 장식을 넣으려면 에어백이 터질 때 파편이 생기지 않는지, 햇빛과 온도 변화에 갈라지지 않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18세기 마차 장인은 ‘아름답고 튼튼하게’만 만들면 됐지만, 21세기 뮬리너는 ‘아름답고, 튼튼하고, 법규와 안전 기준을 통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 차이가 현대 코치빌딩의 진짜 난이도입니다.
고객이 “할머니가 쓰던 찻잔의 색”을 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조색 자체도 어렵지만, 그 색이 자동차 곡면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빛 반사에 따라 달라지는 ‘플롭’ 현상), 자외선에 장기간 견딜 수 있는지, 보수 도장 때 재현 가능한지까지 검증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급 브랜드의 맞춤 색상은 ‘팔레트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개발 프로젝트’에 가깝습니다.
12왜 지금 코치빌딩이 다시 뜨는가
한동안 ‘사라진 기술’로 취급되던 코치빌딩은 2010년대 후반부터 초고급차 시장의 가장 뜨거운 키워드로 돌아왔습니다. 벤틀리뿐 아니라 롤스로이스, 페라리의 원오프 프로그램, 여러 브랜드의 한정판 경쟁이 이를 보여 줍니다. 그 배경에는 몇 가지 흐름이 겹쳐 있습니다.
① 희소성의 가치 상승. 슈퍼리치 고객층에게 ‘비싼 차’는 더 이상 차별점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 가진 차’, 혹은 ‘전 세계 12명만 가진 차’입니다. 바칼라 12대, 바투르 18대라는 숫자는 바로 그 심리를 정확히 겨냥합니다.
② 수익성. 맞춤 사양은 차량 한 대당 마진을 크게 끌어올립니다. 벤틀리는 최근 몇 년간 실적 발표에서 뮬리너와 개인화 사양이 수익성에 기여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습니다. 대량생산 브랜드가 판매 대수로 승부한다면, 럭셔리 브랜드는 ‘대당 가치’로 승부합니다.
③ 전동화 시대의 정체성. 엔진 소리와 배기량이 브랜드 개성을 상징하던 시대가 저물어 가면서, 럭셔리 브랜드는 무엇으로 차별화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기 모터는 어느 브랜드든 조용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장인의 손길과 소재의 이야기는 쉽게 복제할 수 없습니다. 뮬리너가 바투르로 미래 전기차의 디자인 언어를 먼저 보여 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④ 디지털 제조 기술의 발전. 3D 스캐닝, 3D 프린팅, 디지털 설계 도구는 소량 생산의 비용과 시간을 줄여 줍니다. 블로워 컨티뉴에이션에서 원본 차량을 디지털로 기록한 방식, 바투르에서 금을 3D 프린팅한 방식이 그 예입니다. 역설적으로 첨단 기술이 가장 오래된 공예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죠.
13장인 기술의 계승: 사람이 곧 브랜드다
뮬리너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입니다. 우드 베니어 한 장의 결을 좌우 대칭으로 맞추는 일(북매칭), 가죽 원피에서 흠집을 피해 재단하는 일, 손으로 얇은 코치라인을 긋는 일은 오랜 숙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벤틀리는 크루에서 견습(apprenticeship)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이런 기술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장인 기술이 오늘날 자동차 산업 밖에서도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가죽 공예, 목공, 도장, 자수, 공업 디자인, 3D 모델링 같은 기술은 개인 창작자와 프리랜서 시장에서도 수요가 꾸준합니다. 실제로 재능넷 같은 재능 공유 플랫폼에서는 가죽 소품 제작, 제품 렌더링, 차량 래핑 디자인처럼 ‘맞춤 제작’ 감각을 요구하는 재능이 활발히 거래됩니다. 규모는 다르지만, “한 사람의 요구를 정확히 이해하고 손으로 구현한다”는 본질은 뮬리너 공방과 같습니다.
북매칭(Book-matching) — 한 원목을 얇게 켜 펼친 두 장을 거울처럼 대칭 배치해 결을 맞추는 기법.
코치라인(Coachline) — 차체 옆면에 긋는 가느다란 장식선. 마차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장식.
퀼팅·자수 — 시트와 도어 트림에 패턴이나 문양을 수놓는 기술.
핸드 페인팅·조색 — 고객 샘플에 맞춘 색 개발과 수작업 마감.
14뮬리너가 걸어갈 다음 길: 전동화와 ‘비욘드100’
벤틀리는 ‘비욘드100(Beyond100)’ 전략을 통해 장기적으로 라인업 전체를 전동화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왔고, 이후 시장 상황에 따라 일정은 조정되었지만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확대와 첫 순수 전기차 출시 계획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W12 엔진은 2024년 생산을 마쳤고, 신형 컨티넨탈 GT와 플라잉스퍼는 V8 기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으로 전환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뮬리너의 역할은 오히려 커지고 있습니다. 파워트레인이 표준화될수록 디자인·소재·개인화가 브랜드 가치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투르가 미래 디자인 언어의 예고편이었다면, 앞으로의 뮬리너 프로젝트는 전기차 시대의 벤틀리가 어떤 ‘온기’를 가질지 보여 주는 실험실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지속가능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 되었습니다. 바칼라의 고목 재활용, 식물성 부산물을 활용한 마감재, 천연 섬유 복합소재 같은 시도는 “럭셔리는 낭비”라는 오래된 비판에 대한 브랜드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크루 공장 역시 탄소중립 인증과 재생에너지 활용을 강조해 왔습니다. 수백 년 전 마차 장인이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를 썼듯, 오늘의 뮬리너는 ‘지구에 덜 부담 주는 최고의 재료’를 찾는 중입니다.
15헷갈리기 쉬운 포인트 정리
뮬리너는 몇 년 됐나?
마차 제작업 기준으로는 1760년부터 260년 이상. 벤틀리는 가문의 16세기 마구 제작 이력까지 계보로 언급합니다. “200년”은 오히려 짧게 잡은 표현입니다.
모든 뮬리너가 같은 회사였나?
아닙니다. 노샘프턴, 버밍엄, 런던 등에 뮬리너 이름의 회사가 여럿 있었고, 현재 벤틀리 뮬리너로 이어지는 핵심은 런던의 H.J. 뮬리너입니다.
롤스로이스와 관계는?
1959~1998년 롤스로이스 산하(뮬리너 파크 워드). 1998년 분리 이후 뮬리너 명칭은 벤틀리에 남았습니다.
‘뮬리너’ 배지 = 한정판?
아닙니다. 컬렉션의 뮬리너 트림은 양산 모델 최상위 사양이고, 초소량 한정판은 코치빌트(바칼라·바투르 등)입니다.
뮬리너는 1760년 노샘프턴의 마차 공방에서 출발해, 1897년 런던 H.J. 뮬리너를 거쳐, 1950년대 R-타입 컨티넨탈이라는 걸작을 남겼습니다. 롤스로이스 산하의 뮬리너 파크 워드 시절을 지나 1998년 이후 벤틀리의 비스포크 조직으로 자리 잡았고, 2020년부터는 클래식·코치빌트·컬렉션 세 축으로 활동합니다.
블로워와 스피드 식스 컨티뉴에이션은 과거를 정확히 되살리고, 바칼라와 바투르는 현재의 기술로 미래의 얼굴을 그리며, 컬렉션은 더 많은 고객에게 ‘나만의 벤틀리’를 제공합니다. 말이 엔진으로, 엔진이 모터로 바뀌어도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 사람의 손으로 만든다는 것.
댓글 작성
이 글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먼저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0
지식인의 숲 - 지적 재산권 보호 고지
지적 재산권 보호 고지
- 저작권 및 소유권: 본 컨텐츠는 재능넷의 독점 AI 기술로 생성되었으며, 대한민국 저작권법 및 국제 저작권 협약에 의해 보호됩니다.
- AI 생성 컨텐츠의 법적 지위: 본 AI 생성 컨텐츠는 재능넷의 지적 창작물로 인정되며, 관련 법규에 따라 저작권 보호를 받습니다.
- 사용 제한: 재능넷의 명시적 서면 동의 없이 본 컨텐츠를 복제, 수정, 배포, 또는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됩니다.
- 데이터 수집 금지: 본 컨텐츠에 대한 무단 스크래핑, 크롤링, 및 자동화된 데이터 수집은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됩니다.
- AI 학습 제한: 재능넷의 AI 생성 컨텐츠를 타 AI 모델 학습에 무단 사용하는 행위는 금지되며, 이는 지적 재산권 침해로 간주됩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