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5.0 ⚓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1905년) —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시아 발트 함대를 전멸시킨 날, 장거리 항해와 강철 전함 시대의 결정적 교훈 🌊

⚓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1905년) —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시아 발트 함대를 전멸시킨 날, 장거리 항해와 강철 전함 시대의 결정적 교훈 🌊
1905년 5월 27일 오후, 대한해협 동수도(쓰시마 해협) 위로 두 줄기 검은 연기가 맞닿았습니다. 한쪽은 지구를 반 바퀴 넘게 돌아 7개월 만에 극동에 도착한 러시아 제2·제3태평양 함대, 다른 한쪽은 진해만에서 숨을 고르며 기다리던 일본 연합함대였습니다.
불과 이틀 뒤, 러시아 함대는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전함 8척 가운데 6척이 격침되고 2척이 나포되었으며,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군함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뿐이었습니다. 일본의 손실은 어뢰정 3척이었습니다.
이 글은 쓰시마 해전을 "선박과 해양 모빌리티"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 봅니다. 석탄으로 움직이던 강철 함대가 어떻게 3만 km가 넘는 바다를 건넜는지, 속도 몇 노트의 차이가 왜 승패를 갈랐는지, 무선전신·거리측정기·포탄 화약 같은 기술이 바다 위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었는지까지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 대한해협 동수도에서 맞붙은 일본 기함 미카사(왼쪽, 욱일 깃발 대신 단순화한 일장기 표현)와 러시아 기함 크냐지 수보로프(오른쪽, 성 안드레이 깃발)
🧭 1. 왜 러시아는 지구 반대편에서 함대를 보내야 했나
러일전쟁(1904~1905)은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충돌이었습니다. 1904년 2월 8~9일 밤, 일본 해군은 뤼순(포트아서) 항에 정박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어뢰정으로 기습했고, 같은 시기 인천 앞바다(제물포)에서도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와 포함 코레예츠가 일본 함대와 교전 끝에 자침했습니다. 전쟁의 첫 장면부터 바다가 주무대였던 셈입니다.
섬나라 일본에게 해상 수송로는 생명선이었습니다. 병력·탄약·식량이 모두 배를 타고 한반도와 만주로 건너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러시아 입장에서는 극동 바다의 제해권만 되찾으면 일본 육군의 보급선을 끊어 전쟁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뤼순에 갇힌 제1태평양 함대는 1904년 8월 10일 황해 해전에서 탈출에 실패하며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 러시아 해군의 고민
극동에 남은 전력으로는 일본 연합함대를 이길 수 없다 → 그렇다면 유럽의 발트해에 있는 주력 함대를 보내 뤼순 함대와 합류시키자 →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제2태평양 함대, 흔히 "발트 함대"라 부르는 원정 함대입니다.
문제는 거리였습니다. 발트해의 리바우(현 라트비아 리에파야)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해로로 약 1만 8천 해리(약 3만 3천 km)에 이르는 여정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이 항로 위에 자국의 석탄 보급항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함대 사령관으로는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받던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Zinovy Rozhestvensky) 중장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엄격하고 성미가 급한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었고, 장거리 원정이라는 전례 없는 과제를 떠안게 됩니다.
🚢 2. 3만 km의 원정 — 강철 함대의 '석탄 지옥' 항해
1904년 10월 15일(신력), 로제스트벤스키의 함대는 리바우를 떠났습니다. 출항 직후부터 이 함대는 불운과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승조원 다수가 징집된 신병이었고, 신형 전함들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운전과 훈련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 도거뱅크 사건 — 출항 일주일 만의 외교 참사
1904년 10월 21일 밤, 북해 도거뱅크 해역을 지나던 러시아 함대는 영국 헐(Hull) 선적의 트롤 어선단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해 포격했습니다. 어선 1척이 침몰하고 어부들이 숨지거나 다쳤으며, 혼란 속에 러시아 함정끼리 서로를 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영국 여론은 폭발했고 영국 해군이 함대를 추적하는 등 한때 전쟁 직전의 긴장이 흘렀습니다. 사건은 국제 조사위원회를 통해 러시아의 배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 일은 함대의 훈련 부족과 극도의 신경과민을 세계에 보여 준 장면이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영국과의 관계였습니다. 영국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일본의 동맹국이었고, 세계 곳곳의 석탄 기지와 수에즈 운하 주변의 영향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함대는 영국 항구에서 석탄을 받을 수 없었고, 중립국 항구에서도 오래 머무르기 어려웠습니다.
⛽ 석탄, 석탄, 또 석탄
당시 군함은 석탄을 때서 보일러로 증기를 만들고, 그 증기로 왕복동 증기기관을 돌려 스크루를 회전시켰습니다. 전함 한 척이 하루 항해에 태우는 석탄은 속력과 함종에 따라 수십 톤에서 백 톤이 넘는 수준이었고, 함대 전체로는 엄청난 양이 필요했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해운사 함부르크-아메리카 라인(HAPAG)과 계약해 석탄 운반선(콜리어)을 항로 곳곳에 대기시켰습니다. 함대는 바다 한가운데나 외딴 정박지에서 운반선을 옆에 대고 사람 손으로 석탄 자루를 옮겨 실었습니다. 열대의 뙤약볕 아래 석탄 가루를 뒤집어쓰며 며칠씩 이어지는 작업은 승조원들의 체력을 바닥냈습니다.
📦 과적이라는 숨은 함정
보급 기회가 불확실하다 보니 함장들은 석탄을 가능한 한 많이 실었습니다. 갑판과 거주 구역, 심지어 통로에까지 석탄 자루가 쌓였습니다. 이로 인해 배는 설계보다 깊이 가라앉았고, 수선(水線) 부근을 보호해야 할 주장갑대(벨트 아머)가 물속으로 잠겨 버리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장갑이 지켜야 할 높이보다 위쪽, 얇은 부분이 적의 포탄에 노출된 것입니다.
특히 신형 보로디노급 전함들은 건조 과정에서 이미 설계 중량을 초과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에, 과적의 영향이 더 컸습니다.
🗺️ 두 갈래 항로와 마다가스카르의 긴 기다림
대형 전함들은 흘수(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 문제와 외교적 부담 때문에 수에즈 운하 대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도는 항로를 택했습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작은 함정들은 드미트리 폴케르삼 소장의 지휘 아래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홍해로 내려갔습니다. 두 무리는 1905년 1월 초 마다가스카르 북서쪽 노시베(Nosy Be)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함대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1905년 1월 2일 뤼순 요새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합류 대상이던 제1태평양 함대도 항내에서 궤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정의 목적 자체가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함대는 본국의 결정과 추가 증원, 석탄 보급을 기다리며 노시베에서 약 두 달을 머물렀습니다. 열대 기후, 질병, 지루함, 규율 해이가 겹쳤고, 3월에는 육상에서 펑톈(묵덴) 회전 패배 소식까지 전해졌습니다.
1905년 3월 중순 노시베를 떠난 함대는 인도양을 횡단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 베트남) 연안의 캄란만·반퐁만 일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5월 9일, 본국에서 뒤따라 출발한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소장의 제3태평양 함대가 합류했습니다. 제3함대는 구식 전함 니콜라이 1세와 해안방어함 3척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로제스트벤스키는 이 낡은 배들이 오히려 함대 속도를 떨어뜨리는 짐이 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실제 축척이 아닌 개념도입니다. 주력은 아프리카를 돌고, 일부 함정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뒤 마다가스카르에서 합류했습니다.
대양 원정을 마치고 극동에 닿은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놀라운 해양 운용 기록이었습니다. 수십 척의 전투함과 보조함이 중립항의 제한, 열대 기후, 적대적 외교 환경 속에서 7개월 넘게 바다를 건넜으니까요. 그러나 이 여정은 함대를 단련시키기보다 소모시켰습니다. 선체 바닥에는 열대 바다의 따개비와 해조류가 달라붙어 저항이 커졌고, 기관은 정비가 부족했으며, 사격 훈련용 포탄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 3. 기다리는 쪽의 이점 — 도고 헤이하치로와 일본 연합함대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는 사쓰마 번 출신으로, 젊은 시절 영국에서 상선 사관 교육을 받으며 해양 실무를 익혔습니다. 청일전쟁 당시 순양함 나니와의 함장으로 영국 국적 수송선 고승호를 격침한 일로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뤼순 봉쇄와 황해 해전을 치른 연합함대는 뤼순 함락 이후 귀국해 함정을 도크에 넣고 수리·정비를 마쳤습니다. 함저를 청소하고, 포신을 교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맹렬한 사격 훈련을 반복했습니다. 이후 함대는 한반도 남해안의 진해만(당시 마산포 일대)에 집결해 러시아 함대를 기다렸습니다.
뤼순 함락 후 본국에서 수리·도장·함저 청소를 마쳐 설계 속력을 상당 부분 회복했습니다. 함대 속력은 대략 15노트 안팎을 낼 수 있었습니다.
1904년 내내 뤼순 봉쇄와 황해 해전을 치르며 함대 기동과 장거리 포격을 실제로 경험한 장병이 많았습니다.
진해·사세보 등 기지가 가까워 석탄·탄약 보급이 쉬웠고, 해협 일대의 해류와 지형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도고의 곁에는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真之)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해군 전략가 앨프리드 머핸의 사상을 접하고 미서전쟁을 관전하는 등 해전 이론을 깊이 연구한 인물로, 쓰시마 해전 작전 계획의 핵심 입안자로 평가됩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지나갈 수 있는 항로를 몇 겹의 구역으로 나누고, 주간 함대 결전 뒤 야간에는 구축함·어뢰정으로 공격하는 단계적 섬멸 구상을 준비했습니다.
🤔 러시아 함대는 어느 길로 올까?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 항로 | 장점 | 단점 |
|---|---|---|
| 쓰시마 해협 (대한해협) | 가장 짧고 직선적. 석탄 소모가 적음 | 일본 본토·진해 기지와 가까워 요격당하기 쉬움 |
| 쓰가루 해협 (혼슈–홋카이도) | 일본 주력 기지에서 멀리 떨어짐 | 태평양을 크게 돌아야 해서 석탄 부족 위험 |
| 라페루즈(소야) 해협 (홋카이도–사할린) | 가장 안전해 보이는 우회로 | 가장 먼 거리. 짙은 안개와 좁은 수로 |
석탄 사정과 지친 함대 상태를 고려한 로제스트벤스키는 가장 짧은 쓰시마 해협을 택했습니다. 일본 측도 쓰시마 경유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고 진해에 주력을 두었지만, 러시아 함대의 소식이 끊긴 며칠 동안 다른 해협으로 우회할 가능성 때문에 긴장이 컸다고 전해집니다.
📡 4. "적함 보임" — 무선전신이 연 새로운 해전
1905년 5월 27일 새벽, 고토 열도 근해를 초계하던 일본 가장순양함(상선을 개조한 보조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는 안개 속에서 불빛을 밝힌 배를 발견했습니다. 러시아 함대의 병원선 오룔(Орёл)이었습니다. 국제 규칙에 따라 등화를 켜고 있던 병원선 덕분에 러시아 함대 전체의 위치가 드러난 것입니다. 시나노마루는 이른 새벽 "적 함대 발견" 취지의 무선 신호를 보냈습니다.
📻 36식 무선전신기
일본 해군은 1903년(메이지 36년)에 제식화한 36식 무선전신기를 주요 함정에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마르코니가 대서양 횡단 무선 통신에 성공한 것이 1901년이었으니, 불과 몇 년 만에 군함에 실전 배치된 최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시나노마루의 보고는 중계를 거쳐 진해만의 기함 미카사에 전달되었고, 이를 받은 도고는 즉시 출동을 명령했습니다. 정찰함이 적을 발견한 순간 수백 km 떨어진 사령부가 실시간에 가깝게 반응한 것, 이것이 근대 해전에서 무선 정보전이 결정적 역할을 한 대표적 초기 사례로 꼽힙니다.
이때 연합함대가 대본영에 보낸 출동 보고 전문은 일본에서 지금도 자주 인용됩니다.
"적함을 발견했다는 경보를 받고 연합함대는 즉시 출동하여 이를 격멸하고자 한다. 본일 천기 청랑하나 파도 높음(本日天気晴朗ナレドモ波高シ)."
※ 마지막 구절은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덧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계가 좋아 포격전에 유리하지만, 파도가 높아 작은 어뢰정 운용에는 불리하고 사격 플랫폼이 흔들린다는 해상 상황을 함축한 문장으로 해석됩니다.
해양 모빌리티 관점에서 '파도 높음'은 단순한 날씨 묘사가 아닙니다. 파고는 함포 사격의 안정성, 작은 함정의 항해 가능 여부, 낮은 건현(乾舷, 수면에서 갑판까지의 높이)을 가진 배의 침수 위험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실제로 과적으로 건현이 낮아진 러시아 전함들은 포탄으로 생긴 구멍을 통해 바닷물이 쉽게 들이찼습니다.
⚔️ 5. 5월 27일 오후 — 주간 함대 결전의 시간표
이제 해전의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시각은 일본 측 기록 기준의 대략적인 값이며, 자료마다 수 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시나노마루가 병원선 오룔의 불빛으로 러시아 함대를 포착, 무선 보고. 도고 출동 명령.
일본 순양함들이 러시아 함대에 접촉을 유지하며 진형·속력·침로를 계속 무선으로 보고.
미카사에서 러시아 주력을 육안으로 확인. 두 함대가 서로 거의 마주 보는 방향으로 접근.
미카사 돛대에 Z기 게양.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에 달렸으니 각원은 한층 분려노력하라."
적 앞에서 일본 제1전대가 차례로 크게 방향을 트는 기동, 이른바 '적전 대회두'(도고 턴) 시작.
러시아 기함 수보로프가 약 7,000m 안팎 거리에서 포문을 엶. 이어 일본 측 응사.
집중 포화를 받은 러시아 전함 오슬랴뱌가 대열을 이탈해 전복·침몰.
기함 수보로프 대파, 로제스트벤스키 중상. 러시아 함대 대열 붕괴, 북쪽 탈출 시도 반복.
전함 알렉산드르 3세, 이어 보로디노 침몰. 수보로프도 어뢰를 맞고 침몰.
일본 구축함·어뢰정의 야간 어뢰 공격. 나바린, 시소이 벨리키, 나히모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등이 치명상.
🔄 '적전 대회두'와 T자 전법 — 기하학으로 읽는 해전
당시 전함의 주포는 함수와 함미의 포탑에, 부포는 양 현측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에게 옆구리(현측)를 보이며 일렬로 지나가야 가장 많은 포를 동시에 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적의 진행 방향 앞을 가로막는 자리를 잡으면, 적은 앞쪽 포만 쓸 수 있고 우리 쪽은 모든 포로 적의 선두함을 두들길 수 있습니다. 대열이 알파벳 T자 모양이 된다고 해서 이를 "T자 긋기(Crossing the T)"라 부릅니다.
▲ 개념도. 실제 해전에서 두 함대는 이후에도 평행에 가까운 진형으로 움직이며 기동을 반복했습니다.
도고의 기동이 대담했던 이유는 회두 지점에 있습니다. 일본 함대가 한 척씩 같은 지점에서 방향을 바꾸는 동안, 그 지점은 러시아 포수들에게 고정된 '과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기함 미카사는 이 단계에서 다수의 피탄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의 사격은 일본 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고, 회두를 마친 일본 전대는 러시아 선두함들, 특히 기함 수보로프와 제2전대 선두 오슬랴뱌에 화력을 집중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쓰시마의 결정적 요인을 'T자 하나'로만 설명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T자 형태는 오래 유지되지 않았고, 이후 전투는 두 함대가 비슷한 방향으로 나란히 달리는 평행전에 가까웠습니다. 진짜 핵심은 일본 함대가 더 빠른 속도로 계속 러시아 선두를 압박하며 유리한 위치를 다시 잡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속도'입니다.
⚙️ 6. 해전을 가른 기술 ① — 속도와 함대 운동
함대 속력은 가장 느린 배에 맞춰집니다. 러시아 함대에는 구식 전함과 해안방어함, 그리고 함대를 따라온 수송선·공작선까지 섞여 있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 주력은 대략 9노트 안팎의 느린 속도로 이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일본 주력은 15노트 안팎을 낼 수 있었습니다.
약 9노트 내외
원정으로 인한 함저 오염, 과적, 기관 피로, 구식 함정 혼재, 비전투 보조선 동행
약 15노트 내외
수리·청소를 마친 선체, 숙련된 기관 운용, 전투함 중심의 편성
시속으로 환산하면 약 11km의 차이. 빠른 쪽이 교전 거리와 위치를 '선택'할 수 있음
속도가 빠른 함대는 상대보다 바깥쪽 큰 원을 그리면서도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러시아 함대가 북쪽(블라디보스토크 방향)으로 빠져나가려고 방향을 틀 때마다 일본 함대는 다시 그 앞을 가로막는 위치로 이동했습니다. 해양 모빌리티로 치면, 엔진 출력이 아니라 '함대 전체의 실효 속도'가 전술의 자유도를 결정한 사례입니다.
🦪 따개비가 해전을 결정한다?
선박의 저항은 크게 마찰 저항과 조파(파도를 만드는) 저항으로 나뉩니다. 저속에서는 선체 표면과 물 사이의 마찰 저항 비중이 큽니다. 열대 해역을 오래 항해하면 선체에 해양 생물이 달라붙어 표면이 거칠어지고 마찰 저항이 크게 늘어납니다. 당시엔 지금 같은 고성능 방오(防汚) 도료가 없었기에, 장기 원정 함대는 같은 석탄을 태워도 속도가 떨어지고 같은 속도를 내려면 석탄을 더 태워야 했습니다.
오늘날 대형 선박이 주기적으로 도크에 들어가 선체를 청소하고 방오 도장을 하는 이유도 연료 효율 때문입니다. 1905년의 러시아 함대는 그 원리를 가장 비싼 방식으로 증명했습니다.
💥 7. 해전을 가른 기술 ② — 포탄, 화약, 그리고 '불바다'
쓰시마 해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시모세 화약(下瀬火薬)입니다. 일본 해군 기사 시모세 마사치카가 실용화한 화약으로, 성분은 피크르산을 기반으로 한 고성능 작약이었습니다. 여기에 이주인 고로가 고안한 민감한 이주인 신관이 결합되면서, 일본 포탄은 함체에 닿는 즉시 강력하게 폭발했습니다.
| 구분 | 일본 측 포탄 경향 | 러시아 측 포탄 경향 |
|---|---|---|
| 작약 | 피크르산계 시모세 화약, 작약 비율이 높은 고폭탄 위주 운용 | 습면화약(피록실린) 계열, 상대적으로 작약량이 적은 철갑탄 성향 |
| 신관 특성 | 민감하게 즉시 폭발 | 장갑 관통 후 폭발을 노린 지연형. 불발이 많았다는 기록 |
| 주요 효과 | 상부 구조물 파괴, 화재, 파편으로 인한 인명·지휘 체계 손상 | 관통은 했으나 폭발하지 않거나 피해가 제한된 사례 다수 보고 |
일본의 고폭탄은 두꺼운 주장갑을 뚫는 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장갑이 얇은 상부 구조·갑판·굴뚝·환기구·통신 설비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폭발은 페인트, 목재 갑판, 갑판 위 석탄과 각종 적재물에 불을 붙였고, 러시아 함정들은 거대한 화재에 휩싸였습니다. 사격 지휘소와 거리측정 장비가 파괴되자 러시아 함포의 명중률은 더 떨어졌습니다.
한편 시모세 화약은 일본 함포 자체에도 위험 요소였습니다. 피크르산은 민감한 물질이어서 포신 안에서 포탄이 조기 폭발하는 사고가 러일전쟁 중 여러 차례 보고되었습니다. 쓰시마 해전에서도 일본 장갑순양함 닛신 등에서 포신 손상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최첨단 기술에는 늘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 거리측정기와 사격 통제
당시 포격전의 교전 거리는 수천 m 수준이었습니다. 수천 m 밖의 움직이는 배를 맞히려면 정확한 거리 측정과 사격 수정이 필요합니다. 일본 함정들은 영국 바 앤 스트라우드(Barr & Stroud)사의 광학 거리측정기를 운용했고, 탄착을 관측해 거리를 수정하는 체계적인 사격 훈련을 거쳤습니다. 러시아 함정에도 거리측정 장비는 있었지만, 원정 중 실탄 훈련이 부족했고 교전 초기 상부 구조물이 파괴되면서 사격 통제가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 정리하면
쓰시마 해전은 "누가 더 큰 대포를 가졌는가"보다 "누가 더 빨리 정확하게, 지속적으로 명중시키는가"의 싸움이었습니다. 정비 상태, 훈련, 속력, 탄약 특성, 통신이 모두 하나의 시스템으로 맞물려 돌아간 쪽이 이겼습니다.
🛡️ 8. 양 함대의 전력 비교
숫자만 놓고 보면 러시아 함대는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전함 수로는 오히려 러시아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함정의 '질'과 '균질성'이 달랐습니다.
| 구분 | 일본 연합함대 (주력) | 러시아 제2·제3태평양 함대 |
|---|---|---|
| 지휘관 | 도고 헤이하치로 대장 제2전대 가미무라 히코노조 중장 | 로제스트벤스키 중장 네보가토프 소장 (제3함대) |
| 기함 | 전함 미카사 | 전함 크냐지 수보로프 |
| 전함 | 4척 (미카사, 시키시마, 후지, 아사히) | 8척 (수보로프, 알렉산드르 3세, 보로디노, 오룔, 오슬랴뱌, 시소이 벨리키, 나바린, 니콜라이 1세) |
| 장갑순양함 | 8척 (닛신·가스가 및 제2전대 이즈모 등 6척) | 소수 (아드미랄 나히모프 등 구식함 포함) |
| 해안방어함 | - | 3척 (우샤코프, 세냐빈, 아프락신) |
| 경량 전력 | 다수의 방호순양함, 구축함, 어뢰정 | 순양함 일부, 구축함 9척 내외 |
| 특징 | 비교적 균질한 고속 장갑함 중심, 숙련도 높음 | 신형과 구식이 혼재, 장기 원정으로 소모 |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본의 장갑순양함 전력입니다. 일본의 장갑순양함들은 전함보다 장갑과 화력은 약했지만 속도가 빠르고 충분한 방어력을 갖춰, 사실상 전함과 함께 전열에 서서 싸웠습니다. 이 덕분에 일본은 '전함 4척'이라는 숫자보다 훨씬 두꺼운 전투선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신형 보로디노급 4척(수보로프, 알렉산드르 3세, 보로디노, 오룔)은 서류상 강력한 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중량 초과와 과적, 상부 구조물이 높은 설계 특성 등이 겹쳐 피격 후 침수와 전복에 취약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실제로 보로디노급 4척 중 3척이 이 해전에서 침몰했고, 살아남은 오룔은 다음 날 항복해 일본에 나포되었습니다.
🌙 9. 어둠 속의 어뢰전, 그리고 5월 28일의 항복
해가 지자 일본 주력 전함들은 일단 물러나고, 구축함과 어뢰정 무리가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낮에 큰 손상을 입은 러시아 함정들은 대열을 잃은 채 흩어졌고, 탐조등을 켜면 위치가 드러나고 끄면 접근하는 적을 볼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 야간 공격으로 전함 나바린과 시소이 벨리키, 장갑순양함 아드미랄 나히모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등이 어뢰를 맞고 결국 침몰하거나 자침했습니다. 일본 측이 이 해전에서 잃은 함정 3척이 모두 어뢰정이었다는 점은, 야간 근접 어뢰 공격이 얼마나 위험한 임무였는지 보여 줍니다.
그사이 중상을 입은 로제스트벤스키는 침몰 직전의 수보로프에서 구축함으로 옮겨졌고, 다시 구축함 베도비로 옮겨 탔다가 5월 28일 일본 구축함에 나포되었습니다. 함대의 최고 지휘관이 포로가 된 것입니다.
🏳️ 네보가토프의 항복 (5월 28일)
5월 28일 오전, 울릉도와 독도(당시 서양에서는 리앙쿠르 암초로 표기) 근해에서 네보가토프 소장이 이끄는 잔존 전대(전함 니콜라이 1세·오룔, 해안방어함 아프락신·세냐빈)가 일본 주력에 포위되었습니다. 사거리와 속도 모두 열세였던 그는 승조원들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항복을 선택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러시아 장병 다수의 목숨이 구해졌지만, 그는 귀국 후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었고 이후 사면되었습니다.
이 무리에 있던 순양함 이즈무루드는 항복을 거부하고 고속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했으나, 이후 연해주 해안에서 좌초해 승조원들에 의해 폭파되었습니다.
🇰🇷 한반도 바다에 남은 러시아 함정들
쓰시마 해전의 마지막 장면들은 우리 바다에서 펼쳐졌습니다. 해안방어함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싸우다 격침되었습니다. 순양함 스베틀라나는 동해안 인근에서 일본 순양함들과 교전 끝에 침몰했습니다.
특히 잘 알려진 배가 장갑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입니다. 5월 28일 저녁 울릉도 근해에서 일본 순양함·구축함들과 교전한 뒤, 승조원들은 울릉도에 상륙했고 함은 울릉도 앞바다에서 자침했습니다. 이 배는 훗날 "금괴를 싣고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한국에서 보물선 논란과 투자 사기 사건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그러한 보물 적재설은 신뢰할 만한 사료로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배의 진짜 가치는 한반도 해역에 남은 러일전쟁의 해양 유산이라는 데 있습니다.
러시아 함대 가운데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순양함 알마즈와 구축함 그로즈니, 브라비뿐이었습니다. 순양함 올레크·오로라·젬추크는 남쪽으로 도주해 미국령 필리핀 마닐라에 들어가 무장 해제되고 억류되었습니다. 이 중 오로라는 훗날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겨울궁전 공격의 신호탄과 연관되어 유명해졌고, 지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 10. 숫자로 보는 결과 — 근대 해전사상 가장 일방적인 승리
러시아 전사자 (문헌에 따라 4천~5천 명 범위로 제시)
러시아 포로 (로제스트벤스키·네보가토프 포함)
일본 전사자 (부상자 약 500명대)
일본 손실 함정 (모두 어뢰정)
▲ 집계 방식(보조선·병원선 포함 여부)에 따라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함대 대 함대의 정면 결전에서 한쪽 주력이 이처럼 거의 완전히 소멸한 사례는 근대 해전사에서 매우 드뭅니다. 서양 언론은 이 해전을 넬슨의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 견주었고, 정확히 100년 뒤에 벌어진 이 승리로 도고는 "동양의 넬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또 하나 짚어 둘 기술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해전 초반 침몰한 오슬랴뱌는 철갑 전함 시대에 함포 사격만으로 격침된 첫 전함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전까지 철갑 전함은 포격으로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고폭탄의 집중 사격과 침수가 결합하면 대형 전함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가라앉을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 11. 해전 이후 — 동아시아와 세계가 바뀌다
🖋️ 포츠머스 조약과 대한제국의 운명
쓰시마 해전 패배로 러시아는 바다를 통한 반격 가능성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국내에서는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이후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6월에는 흑해 함대의 전함 포톰킨에서 수병 반란까지 일어났습니다. 일본 역시 장기전으로 재정과 병력이 한계에 이른 상태였습니다.
양국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를 받아들였고,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적 우월권을 인정했고, 뤼순·다롄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 일부,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 우리 역사에서 본 쓰시마 해전
쓰시마 해전은 일본에게는 국가적 영광의 기억이지만, 한국사에서는 국권 상실의 결정적 길목이었습니다. 해전 몇 달 뒤인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했습니다.
또한 일본은 러일전쟁 중 해상 감시와 통신망 구축의 필요성을 내세워 한반도 연안과 울릉도 등에 군사 시설을 설치했고, 1905년 2월에는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 편입을 일방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러일전쟁의 해상전은 동해의 섬들과 우리 바다의 역사와 깊이 얽혀 있습니다.
같은 바다를 두고 한쪽은 승전 기념일을, 다른 한쪽은 주권 상실의 전조를 기억합니다. 해양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렇게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해안선에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 드레드노트의 탄생 — 군함 설계의 대전환
쓰시마 해전은 세계 해군에게 거대한 실험 결과지를 던졌습니다. 각국 해군 관계자들은 이 해전과 앞선 황해 해전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대표적인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거리 교전 시대
교전 거리가 늘어나면서 구경이 섞인 함포보다 같은 구경의 대구경 주포로 통일해 탄착 관측과 사격 수정을 쉽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속도의 전술적 가치
빠른 함대가 교전의 주도권을 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증기터빈 같은 고속 추진 기술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피해 통제와 안정성
과적·상부 중량·화재가 함정 생존성에 치명적이라는 점이 드러나, 가연물 관리와 침수 대응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영국은 1905년 10월 혁신적 전함 HMS 드레드노트를 기공해 1906년 2월 진수했습니다. 동일 구경 12인치 주포 10문을 탑재하고, 대형 전함 최초로 증기터빈을 채택해 약 21노트를 냈습니다. 드레드노트의 '단일 거포' 구상은 쓰시마 이전부터 영국·미국·이탈리아 등에서 논의되던 것이었고, 쓰시마의 교훈만으로 탄생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쓰시마 해전은 그 구상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실전 사례로 활용되었습니다. 이후 세계 각국은 '드레드노트급' 건조 경쟁에 뛰어들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전의 해군 군비 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
🧑✈️ 12. 두 제독,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들
승전 후 해군 군령부장 등을 지내고 원수 칭호를 받았으며, 쇼와 천황의 교육에도 관여했습니다. 1934년 사망해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일본에서는 군신(軍神)으로 숭배되었고, 그 신격화는 이후 일본 해군의 '함대 결전' 사고방식이 경직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포로로 일본에 머물 때 일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도고가 직접 문병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귀국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중상으로 지휘 불능 상태였다는 점이 참작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909년 사망했습니다.
한국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도고가 조선의 명장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일화입니다. 승전 축하연에서 자신을 넬슨에 비교하는 것은 좋지만 이순신에게 비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내용인데, 이 발언은 1차 사료로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 전승에 가깝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다만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 내부에서 이순신의 전술과 리더십이 연구되고 언급되었다는 기록 자체는 존재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일수록 출처를 한 번 더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 지금도 남아 있는 기함 미카사
도고의 기함 미카사는 영국 비커스사 배로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1902년 완공된 전함입니다. 해전 몇 달 뒤인 1905년 9월 사세보 항에서 탄약고 폭발 사고로 침몰했다가 인양되어 다시 취역했고,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퇴역한 뒤 요코스카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때 방치되어 크게 훼손되었으나 1961년 복원되어 지금도 요코스카의 공원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드레드노트(Pre-dreadnought)급 전함 가운데 현존하는 매우 드문 사례로, 선박사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입니다.
🧩 13. 해양 모빌리티 관점의 핵심 교훈
쓰시마 해전을 '전쟁사'가 아니라 '바다 위 이동 시스템의 실패와 성공'으로 다시 정리해 보면, 오늘날의 해운·물류·함정 운용에도 그대로 통하는 원칙들이 보입니다.
| 원칙 | 1905년의 사례 | 오늘날의 해양 모빌리티 |
|---|---|---|
| ⛽ 에너지 보급망 | 러시아는 중립국·외국 상선의 석탄 공급에 의존, 해상 환적에 막대한 시간 소모 | 벙커링 거점, 친환경 연료(LNG·메탄올·암모니아) 공급망 확보가 선대 운용의 핵심 |
| 🦪 선체 상태 | 원정 중 함저 오염으로 속도·연비 저하 | 방오 도료, 정기 선체 청소, 연료 효율·탄소 배출 지표 관리 |
| ⚖️ 적재와 복원성 | 석탄 과적으로 장갑대가 수면 아래로, 건현 감소 | 만재흘수선 규정, 복원성 계산, 화물 고박 기준 |
| 🚦 선단 속도 | 가장 느린 배에 맞춘 약 9노트 함대 | 호송·선단 운항, 물류 체인의 병목 관리 |
| 📡 통신과 정보 | 무선전신으로 정찰 정보를 실시간 공유 | 위성통신, AIS(선박자동식별장치), 해양 데이터 플랫폼 |
| 🔥 피해 통제 | 상부 가연물과 화재가 전투력 상실로 직결 | 선박 화재 안전 기준(SOLAS), 승무원 소화·퇴선 훈련 |
특히 '적재와 복원성' 문제는 지금도 해양 사고 분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배에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 싣느냐는 단순한 물류 문제가 아니라 배의 생존 그 자체와 연결됩니다. 1905년의 러시아 전함들이 보여 준 비극은 해양 안전 교육에서 지금도 유효한 교재입니다.
💡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만약 로제스트벤스키가 구식 함정과 보조선을 떼어내고 신형 전함만으로 더 빠르게 움직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많은 연구자들은 속도 차이를 다소 줄일 수는 있었겠지만, 훈련 부족·과적·탄약 문제·지친 승조원이라는 구조적 약점은 그대로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해전은 결국 한 번의 기동이 아니라 수개월에 걸친 준비의 총합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와 기술이 맞물린 이런 주제는 혼자 파고들기보다 다른 사람의 시각을 빌려 볼 때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해양사 강의, 군사사 리서치, 선박 일러스트나 인포그래픽 제작처럼 전문 재능이 필요한 일이라면 재능넷에서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 협업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14. 한눈에 정리
1905년 5월 27~28일, 대한해협 동수도(쓰시마 해협)에서 동해 울릉도 근해까지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연합함대 vs 로제스트벤스키의 러시아 제2·제3태평양 함대
무선 정찰 → 적전 회두와 집중 포격 → 야간 어뢰 공격 → 잔존 함대 포위·항복의 단계적 섬멸
속도 우위, 정비 상태, 사격 숙련도, 고폭탄과 화재 효과, 무선 통신, 기지와의 근접성
3만 km 원정의 소모, 석탄 과적, 혼합 편성의 저속, 훈련 부족, 지휘 체계 붕괴
포츠머스 조약, 을사늑약과 한국 국권 침탈, 드레드노트 시대와 세계 해군 군비 경쟁
쓰시마 해전은 "누가 더 용감했는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료를 어떻게 보급하고, 배를 어떻게 관리하고, 정보를 어떻게 나누고, 무엇을 얼마나 실었는가 같은 해양 모빌리티의 기본기가 국가의 운명까지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 한반도의 근대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까지 함께 기억할 때, 이 해전은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읽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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