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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드라이든: 왕정복고 시대의 계관시인과 영웅시의 부활 — 영웅 2행 연구로 '벽돌을 대리석으로' 바꾼 사람

📜 셰익스피어와 밀턴 사이, 그리고 알렉산더 포프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극장의 흥행 작가였고, 국왕이 임명한 계관시인(Poet Laureate)이었으며, 런던 커피하우스에서 문학 논쟁의 판정관 노릇을 하던 비평가였고, 베르길리우스를 영어로 옮긴 번역가였습니다. 바로 존 드라이든(John Dryden, 1631~1700)입니다.

영문학사는 1660년부터 1700년까지를 아예 '드라이든의 시대(The Age of Dryden)'라고 부릅니다. 한 시인의 이름이 40년을 대표한다는 것, 그 자체가 그의 무게를 말해 줍니다. 이 글에서는 그가 어떻게 혁명과 왕정복고, 명예혁명이라는 정치적 롤러코스터 위에서 살아남았고, 어떻게 영웅 2행 연구(heroic couplet)라는 형식을 영시의 표준 엔진으로 만들었는지 따라가 봅니다.

왕정복고의 계관시인 존 드라이든 1631–1700 약·강 다섯 걸음, 두 줄이 한 쌍 "위대한 재치는 광기와 가까운 이웃, 얇은 칸막이 하나가 둘을 가른다." — 『압살롬과 아히도벨』(1681) 영웅 2행 연구 · 풍자시 · 영웅극 · 비평 · 번역

1. 혁명과 복고 사이에서 태어난 시인

📍 노샘프턴셔의 청교도 집안

존 드라이든은 1631년 8월 9일 잉글랜드 중부 노샘프턴셔(Northamptonshire)의 올드윙클(Aldwincle)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쪽, 어머니 쪽 모두 의회파·청교도 성향이 강한 젠트리 집안이었죠. 이 출신 배경은 훗날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가 됩니다. 청교도 집안 출신 소년이 자라서 국왕 찰스 2세의 계관시인이 되고, 말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공부했습니다. 당시 교장은 엄격한 체벌과 탁월한 고전 교육으로 유명한 리처드 버스비(Richard Busby)였습니다. 이곳에서 드라이든은 라틴어·그리스어 고전을 몸에 익혔는데, 이 훈련은 훗날 그가 유베날리스·페르시우스·베르길리우스를 번역하는 밑바탕이 됩니다. 학창 시절 그는 천연두로 요절한 동급생 헤이스팅스 경을 애도하는 시 「헤이스팅스 경의 죽음에 부쳐(Upon the Death of the Lord Hastings)」(1649)를 써서 처음 인쇄 지면에 이름을 올립니다. 흥미롭게도 같은 해 1649년은 찰스 1세가 처형된 해이기도 합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진학해 1654년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약간의 토지 수입을 물려받았고, 곧 런던으로 나가 크롬웰 정부의 관리직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의 친척 존 피커링 경(Sir Gilbert Pickering)이 크롬웰 정권의 요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 크롬웰 추모시에서 국왕 환영시까지 — '변절자'라는 꼬리표

드라이든의 첫 본격적인 시는 『영웅적 연(Heroic Stanzas)』(1659), 바로 1658년에 사망한 올리버 크롬웰을 추모하는 시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1년 뒤 1660년, 찰스 2세가 망명지에서 돌아와 왕정이 복고되자 드라이든은 『아스트라이아 레둑스(Astraea Redux)』를 발표하여 국왕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아스트라이아'는 정의의 여신이고, '레둑스'는 라틴어로 '돌아온'이라는 뜻입니다. 즉 "정의의 여신이 돌아왔다"는 제목입니다.

🤔 정말 기회주의자였을까?
정적들은 평생 이 두 편의 시를 들이밀며 드라이든을 '바람 따라 도는 풍향계'라고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공정하게 보면, 1660년의 잉글랜드에서 그런 전향은 드라이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크롬웰 사후 혼란에 지친 다수의 국민이 왕정복고를 환영했고, 수많은 문인과 관료가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드라이든이 마지막 큰 정치적 전환(명예혁명) 때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다룹니다.

왕정복고 이후 그는 1662년 갓 설립된 과학 단체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회원으로 선출됩니다. 시인이 과학 학회에 들어간 것이 낯설어 보이지만, 이는 그 시대 지식인 문화의 단면입니다. 왕립학회는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는 '평이한 문체(plain style)'를 지향했고, 드라이든이 추구한 명료한 영어 산문과 정확한 운문도 바로 이 정신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회비를 제대로 내지 않아 몇 년 뒤 회원 자격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1663년에는 엘리자베스 하워드(Lady Elizabeth Howard)와 결혼합니다. 그녀는 버크셔 백작의 딸이었고, 그녀의 오빠 로버트 하워드 경(Sir Robert Howard)은 극작가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드라이든을 귀족 사회와 극장계에 단단히 연결해 주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찰스, 존, 에라스무스 헨리 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2. 『기적의 해』 — 대화재와 전쟁을 노래하다

1666년은 런던에게 악몽의 해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해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9월에는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가 도시의 상당 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 전해에는 대역병까지 휩쓸었죠. 드라이든은 이 해를 거꾸로 『아누스 미라빌리스(Annus Mirabilis, 기적의 해)』(1667)라고 불렀습니다.

왜 '재앙의 해'가 아니라 '기적의 해'였을까요? 당시 일부 반정부 세력은 이 재앙들을 '왕정에 내린 신의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팸플릿을 퍼뜨렸습니다. 드라이든은 정반대의 서사를 짰습니다. 해전에서의 영국 함대의 용맹, 화재 속에서 백성을 걱정하며 기도하는 국왕, 그리고 잿더미 위에서 더 웅장하게 재건될 런던의 미래. 즉 재앙을 '시련 끝의 부활' 서사로 재포장한 정치적 시였던 것입니다.

🔥 형식
4행 연(quatrain), 각 행은 약강 5보격, 교차 운(abab). 아직 2행 연구로 넘어가기 전 단계입니다.
⚓ 내용
네덜란드와의 해전 묘사와 런던 대화재, 그리고 상업 대국으로서 런던의 재건 예언.
👑 정치적 효과
찰스 2세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로 형상화, '신의 심판' 담론에 맞서는 왕당파의 응답.

이 시는 드라이든을 궁정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인 1668년, 그는 계관시인으로 임명됩니다. 1670년에는 왕실 사료편찬관(Historiographer Royal) 직까지 더해졌습니다.

3. 계관시인이라는 자리 — 왕관 옆의 펜

'계관시인(Poet Laureate)'이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뛰어난 시인에게 월계관(laurel)을 씌워 주던 전통에서 왔습니다. 영국에서 이 칭호를 받은 시인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벤 존슨(Ben Jonson)은 제임스 1세에게 연금을 받았고, 윌리엄 대버넌트(William Davenant)도 사실상 그 역할을 했죠. 하지만 국왕의 공식 임명장으로 '계관시인'이라는 직위가 명확히 부여된 최초의 인물로 흔히 드라이든이 꼽힙니다. 즉 그는 영국 계관시인 제도가 공식화되는 출발점에 선 사람입니다.

구분내용
임명 연도1668년 (대버넌트 사후)
추가 직위1670년 왕실 사료편찬관
역할왕실의 경사·국가 행사를 노래하고, 정치적 논쟁에서 왕권을 옹호하는 '문학적 대변인'
직위 상실1689년, 명예혁명 이후 새 왕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하여 박탈
후임그의 숙적 토머스 섀드웰(Thomas Shadwell)

계관시인의 연봉은 명예에 비해 넉넉하지 않았고, 찰스 2세 정부의 재정난 때문에 지급이 자주 밀렸습니다. 그래서 드라이든에게 계관시인직은 '안정된 생계'라기보다 문단 최정상이라는 상징 자본에 가까웠습니다. 실제 수입의 큰 축은 극장이었습니다.

4. 영웅극(Heroic Drama) — 사랑이냐, 명예냐

🎭 다시 열린 극장

청교도 정부는 1642년 극장을 폐쇄했습니다. 18년 동안 잠들어 있던 런던의 극장은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다시 문을 열었고, 이때부터 여성 배우가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망명 시절 프랑스 궁정 문화를 맛본 찰스 2세와 귀족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를 원했습니다. 이 수요에 가장 정확하게 답한 작가가 드라이든이었습니다.

그가 이끈 장르가 바로 영웅극(heroic play)입니다.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압운 대사
대사를 영웅 2행 연구, 즉 각운을 맞춘 약강 5보격 두 줄씩으로 씁니다. 배우들이 대사를 노래하듯 주고받는 효과가 납니다.
② 사랑 vs 명예
주인공은 사랑과 명예(의무·충성) 사이의 극단적 갈등에 놓입니다. 감정의 강도가 최고조까지 올라갑니다.
③ 이국적 무대
잉카와 아즈텍의 멕시코, 무어인의 그라나다, 무굴제국 인도 등 먼 땅의 제국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④ 초인적 영웅
거의 신화적인 힘과 자존심을 가진 전사가 등장합니다. 대표 인물이 알만조르(Almanzor)입니다.

🗡️ 대표작으로 보는 영웅극의 계보

1664 — 『인디언 여왕(The Indian Queen)』: 처남 로버트 하워드와 공동 집필. 화려한 무대 장치로 화제가 되었고, 훗날 1695년에 헨리 퍼셀의 음악이 붙은 세미오페라 판으로도 공연됩니다.
1665 — 『인디언 황제(The Indian Emperour)』: 『인디언 여왕』의 후속작.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과 몬테수마를 다룹니다.
1670–71 — 『그라나다 정복(The Conquest of Granada)』 1·2부: 영웅극의 절정. 무적의 전사 알만조르가 주인공이며, 이 작품에는 영문학에서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이라는 표현이 쓰인 이른 예로 자주 인용되는 대사가 나옵니다.
1675 — 『아우렝제브(Aureng-Zebe)』: 무굴 제국의 왕위 계승 다툼을 다룬 작품. 그가 압운 대사로 쓴 마지막 영웅극이며, 서문에서 그는 압운에 대한 피로감을 고백합니다.
나는 자연이 처음 사람을 만들었을 때처럼 자유롭다.
노예 같은 굴레의 법이 생기기 전,
고결한 야만인이 숲을 거닐던 그때처럼.
— 『그라나다 정복』 1부, 알만조르의 대사(의역)

😂 패러디의 표적이 되다 — 『리허설』의 '베이즈'

과장된 영웅극은 당연히 조롱거리도 되었습니다. 1671년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George Villiers)와 동료들이 쓴 풍자극 『리허설(The Rehearsal)』은 영웅극을 신랄하게 패러디했는데, 극 중 허세 가득한 극작가 '베이즈(Bayes)'는 누가 봐도 드라이든이었습니다. '베이즈'는 월계수(bay laurel)에서 따온 이름으로, 계관시인을 비꼰 것이죠. 이 별명은 이후 오랫동안 드라이든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드라이든은 10년 뒤, 버킹엄을 자신의 풍자시에서 '짐리(Zimri)'로 등장시켜 멋지게 복수합니다.

💔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해』 — 압운을 내려놓다

1677년 초연(1678년 출간)된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해, 또는 잃어도 좋은 세상(All for Love, or The World Well Lost)』은 드라이든 극작의 전환점입니다. 소재는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와 같지만, 접근법은 정반대입니다.

비교 항목셰익스피어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드라이든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해』
시공간로마·이집트·전장을 넘나드는 광대한 무대, 긴 시간알렉산드리아, 안토니 생애의 마지막 날 중심
규칙고전 극작 규칙에 얽매이지 않음시간·장소·행동의 '삼일치'를 의식적으로 적용
운문무운시(blank verse)무운시 — 압운 영웅극에서 벗어나 셰익스피어 방식을 채택
초점제국의 운명과 두 인물의 복합성사랑과 의무 사이 갈등의 집중적 압축

드라이든은 서문에서 이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문체를 모방했다"고 밝힙니다. 그는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질서와 셰익스피어의 시적 에너지를 결합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18세기 내내 셰익스피어의 원작보다 더 자주 공연되었다고 할 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 희극과 오페라까지

드라이든은 비극만 쓴 작가가 아닙니다. 『유행에 따른 결혼(Marriage à la Mode)』(1672)은 진지한 플롯과 재기 넘치는 연애 희극을 엮은 작품으로 왕정복고 희극의 수작으로 꼽히고, 『스페인 수도사(The Spanish Friar)』(1680)도 흥행했습니다. 말년에는 『돈 세바스티안(Don Sebastian)』(1689), 『암피트리온(Amphitryon)』(1690)을 썼고, 작곡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과 손잡은 세미오페라 『아서 왕(King Arthur)』(1691)은 영국 음악극의 중요한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작가가 비극·희극·음악극을 오가며 30편 가까운 극을 무대에 올린 셈이니, 오늘날로 치면 극작가·작사가·시나리오 각색가를 겸한 멀티 크리에이터였습니다. 재능넷 같은 재능 거래 플랫폼에서 여러 분야의 재능을 동시에 펼치는 크리에이터들을 떠올리면, 드라이든이 얼마나 '전방위형' 작가였는지 실감이 납니다.

5. 영웅 2행 연구 — 영시의 표준 엔진을 만들다

🔧 구조 해부: 다섯 걸음, 두 줄, 하나의 운

영웅 2행 연구(heroic couplet)란 약강 5보격(iambic pentameter)으로 된 두 행이 서로 각운을 맞추는 형식입니다. '약강'은 약한 음절 뒤에 강한 음절이 오는 한 묶음(음보)을 말하고, 그것이 한 행에 다섯 번 반복됩니다. 그래서 한 행은 대략 10음절이 됩니다.

이 형식 자체는 드라이든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14세기 제프리 초서가 『캔터베리 이야기』의 상당 부분에서 이미 썼고, 17세기 전반에는 에드먼드 월러(Edmund Waller)와 존 데넘(John Denham)이 이를 매끄럽고 균형 잡힌 형태로 다듬었습니다. 드라이든 자신도 월러와 데넘을 영시를 정제한 선구자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드라이든이 한 일은 이 형식을 풍자·논쟁·서사·번역·연극까지 무엇이든 실어 나를 수 있는 '범용 엔진'으로 강화한 것이었습니다.

영웅 2행 연구의 리듬 구조 작은 원 = 약(弱) · 큰 원 = 강(强) 1행 운A ‖ 중간 휴지(케수라) 2행 운A 약강 한 쌍 × 5 = 한 행 (약 10음절) 두 행이 같은 소리로 끝나며 하나의 생각을 닫는다 → 짧고 단단한 경구, 날카로운 풍자에 최적

🧱 '닫힌 2행 연구'의 힘

드라이든과 그의 후계자 포프가 즐겨 쓴 것은 이른바 '닫힌 2행 연구(closed couplet)'입니다. 두 행 안에서 문장의 의미가 완결되어 마침표가 찍히는 구조죠. 여기에 행 중간의 휴지(케수라)를 기준으로 앞뒤를 대칭시키면, 대조(antithesis)와 균형(balance)이 극대화됩니다. 칭찬과 비난, 위대함과 우스꽝스러움을 한 줄 안에서 맞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드라이든의 대표적인 장치들도 기억해 둘 만합니다.

🔺 3행 연구(triplet)
두 줄이 아니라 세 줄을 같은 운으로 묶어 흐름에 변화를 줍니다. 드라이든이 특히 즐겨 썼고, 지면에서는 흔히 중괄호 표시로 묶였습니다.
📏 알렉산드린(alexandrine)
5보격 사이에 6보격(12음절) 한 행을 끼워 넣어 단락의 끝을 장중하게 마무리합니다.
🗣️ 구어적 활력
포프의 2행 연구가 보석처럼 세공되었다면, 드라이든의 2행 연구는 연설처럼 힘차게 밀고 나가는 웅변조가 특징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 "벽돌을 대리석으로"
18세기의 문호 새뮤얼 존슨은 『영국 시인전(Lives of the Poets)』의 드라이든 편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를 두고 했다는 말을 빌려 이렇게 평합니다. 드라이든은 영어 시를 벽돌의 상태로 발견하여 대리석으로 남겨 두었다고. 거칠고 들쑥날쑥하던 운율과 어법을 명료하고 우아한 표준어로 다듬었다는 뜻입니다. 존슨은 또한 그를 '영국 비평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6. 비평가 드라이든 — 템스강 위의 문학 토론

🚣 『극시론』(1668): 대포 소리를 들으며 나눈 대화

1665년 6월, 런던 시민들은 템스강 하구 너머 북해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영국 함대와 네덜란드 함대가 맞붙은 로스토프트 해전(Battle of Lowestoft)이었습니다. 드라이든의 비평 대표작 『극시론(An Essay of Dramatic Poesy)』은 바로 이날, 네 신사가 배를 타고 템스강으로 나가 포성을 들으며 문학을 논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대역병으로 극장이 문을 닫았던 시기에 집필되어 1668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템스강 위의 비평 토론, 1665 먼 포성 💥 크라이티스 고대 옹호 유제니어스 근대 옹호 리시데이어스 프랑스극 옹호 니앤더 (드라이든) 영국극·압운 옹호

네 화자는 각자 하나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화자입장핵심 논지
크라이티스(Crites)고대인 옹호그리스·로마 극작가들이 규칙의 모범을 세웠으므로 근대인은 그들을 따라야 한다.
유제니어스(Eugenius)근대인 옹호근대 극은 고대 극의 결점을 개선했고 감정 표현도 더 풍부해졌다.
리시데이어스(Lisideius)프랑스극 옹호코르네유 등 프랑스 극은 삼일치를 지키며 질서정연하다.
니앤더(Neander)영국극 옹호 (드라이든의 대변인)영국극은 규칙에서 자유로운 대신 다채롭고 생동감 있다. 진지한 극에서는 압운 대사가 적절하다.

이름에도 뜻이 숨어 있습니다. '니앤더(Neander)'는 그리스어로 '새로운 사람'이라는 뜻이죠. 학자들은 크라이티스를 로버트 하워드, 유제니어스를 버크허스트 경(찰스 색빌), 리시데이어스를 찰스 세들리 경과 연결하는 해석을 제시해 왔습니다.

이 에세이의 백미는 니앤더가 셰익스피어를 평하는 대목입니다. 드라이든은 셰익스피어를 "근대, 아니 어쩌면 고대까지 포함한 모든 시인 가운데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직접 들여다보았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벤 존슨을 정교한 규칙의 작가로 놓고 "나는 존슨을 존경하지만, 셰익스피어를 사랑한다"는 취지로 대비합니다. 이 평가는 셰익스피어 비평사에서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명구입니다.

🔄 압운 논쟁 — 처남과의 공개 설전
드라이든이 『극시론』에서 압운 대사를 옹호하자, 처남 로버트 하워드는 다른 작품 서문에서 무운시가 더 자연스럽다고 반박했습니다. 드라이든은 다시 「『극시론』 옹호(A Defence of an Essay of Dramatic Poesy)」(1668)로 응수했죠. 가족끼리 서문을 통해 공개 논쟁을 벌인 셈입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10년 뒤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해』에서 드라이든 자신이 무운시로 돌아섭니다. 자신의 이론조차 실험을 통해 수정할 줄 알았던 실용적 비평가의 면모입니다.

📚 서문의 달인

드라이든 비평의 상당 부분은 체계적인 논문이 아니라 작품에 붙인 서문, 헌사, 에필로그에 흩어져 있습니다. 「영웅극에 대하여(Of Heroic Plays)」는 『그라나다 정복』의 서문이고, 번역 이론은 『오비디우스 서간집』(1680) 서문에, 풍자론은 유베날리스 번역 앞에 붙은 「풍자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논고(A Discourse Concerning the Original and Progress of Satire)」(1693)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작품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장르의 원리를 설명하는, '창작자 겸 해설자'였습니다.

그의 산문 자체도 중요한 유산입니다. 긴 라틴식 문장 대신 대화하듯 자연스럽고 명료한 문장을 썼고, 이는 근대 영어 산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일화로, 그는 문장 끝에 전치사를 두는 영어 어법을 라틴어 기준으로 비판하고 자기 글에서 고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장을 전치사로 끝내지 말라'는 규범 논쟁의 뿌리를 드라이든에게서 찾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 윌스 커피하우스의 '왕좌'

런던 코벤트 가든 근처의 윌스 커피하우스(Will's Coffee House)는 왕정복고기 문인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드라이든은 이곳에 지정석을 두고 앉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평했는데, 겨울에는 난롯가, 여름에는 발코니 쪽 자리였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젊은 시인들은 그의 담뱃갑에서 코담배 한 줌을 얻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하죠. 어린 알렉산더 포프가 그곳에서 노년의 드라이든을 먼발치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문학의 '인플루언서'가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한 셈입니다.

7. 풍자시의 황금기 — 펜이 칼이 될 때

👑 정치적 배경: 왕위 계승 배제 위기

드라이든의 최고 걸작들은 1680년 전후의 정치 위기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찰스 2세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왕위 계승자는 동생 요크 공 제임스였습니다. 문제는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라는 점이었습니다. 1678년 이른바 '교황 음모 사건(Popish Plot)'이라는 가짜 음모설이 퍼지면서 반가톨릭 정서가 폭발했고, 의회의 섀프츠베리 백작(Earl of Shaftesbury)은 제임스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려는 법안을 밀어붙였습니다. 대안으로 떠오른 인물이 찰스 2세의 서자이자 인기 높은 개신교도 몬머스 공작(Duke of Monmouth)이었습니다. 이 대립 속에서 훗날 휘그와 토리라는 정파의 원형이 형성됩니다.

📖 『압살롬과 아히도벨』(1681): 성경 속에 숨긴 정치 드라마

1681년 11월, 섀프츠베리가 반역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을 무렵 드라이든은 『압살롬과 아히도벨(Absalom and Achitophel)』을 발표합니다. 그는 구약성경 사무엘하에 나오는 이야기, 즉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이 간신 아히도벨의 꼬드김에 넘어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서사를 빌려 와 당대 정치를 그대로 겹쳐 놓았습니다.

성경 속 인물실제 인물드라이든의 묘사
다윗 왕찰스 2세관대하고 너그러운 군주. 서자가 많다는 사실조차 유머러스하게 처리
압살롬몬머스 공작아름답고 인기 있지만 야심에 흔들리는 아들 — 비난보다 연민의 대상
아히도벨섀프츠베리 백작명석하지만 불안하고 교활한 선동가 — 풍자의 핵심 표적
짐리버킹엄 공작무엇이든 하지만 아무것도 오래 하지 못하는 변덕쟁이
시므이슬링스비 베설(런던 주장관)인색하고 위선적인 관리
코라타이터스 오츠교황 음모설을 날조한 거짓 증인

이 시의 영리함은 국왕의 아들인 몬머스를 직접 비난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찰스 2세는 반항적인 서자를 여전히 아꼈기 때문입니다. 드라이든은 몬머스를 '유혹당한 아름다운 청년'으로, 모든 책임은 아히도벨에게 돌렸습니다. 정치적 감각과 문학적 기교가 완벽하게 맞물린 순간입니다. 표지 그림에서 보았던 그 유명한 구절, "위대한 재치는 광기와 가까운 이웃이고, 얇은 칸막이가 그 경계를 가른다"는 바로 아히도벨(섀프츠베리)의 비범하지만 위험한 지성을 묘사한 대목입니다.

그는 너무도 다재다능하여, 한 사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매사에 고집 세고, 언제나 틀렸으며,
모든 것을 시작하되 어느 것도 오래 하지 않았다.
— 짐리(버킹엄 공작)의 초상, 『압살롬과 아히도벨』(의역)

『리허설』에서 드라이든을 '베이즈'로 조롱했던 버킹엄은 이렇게 10년 만에 영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초상화로 박제되었습니다. 드라이든은 훗날 「풍자에 관한 논고」에서 이 짐리 묘사를 자신이 가장 잘 쓴 풍자로 꼽으며, 상대가 웃으면서도 상처를 입는, '목을 깔끔하게 베어 머리가 몸에 그대로 붙어 있게 하는' 섬세한 처형 같은 풍자를 추구했다고 설명합니다. 거친 몽둥이질이 아니라 예리한 칼날이라는 것이죠.

이듬해 1682년에 나온 제2부는 주로 네이엄 테이트(Nahum Tate)가 썼고, 드라이든은 일부 구절만 맡았습니다. 그중 백미가 시인 토머스 섀드웰을 '오그(Og)', 엘카나 세틀을 '도엑(Doeg)'으로 그려 낸 대목입니다.

🏅 『메달』(1682)

섀프츠베리는 결국 런던 대배심에서 기소가 기각되어 풀려났고, 지지자들은 이를 기념하는 메달을 주조했습니다. 드라이든은 곧바로 『메달: 선동에 대한 풍자(The Medal: A Satire Against Sedition)』로 반격했습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성경 서사의 가면을 썼다면, 『메달』은 더 직설적인 공격이었습니다.

🤡 『맥플레크노』 — 영문학 최초의 본격 '모의 영웅시'

드라이든 풍자의 또 다른 정점은 정치가 아니라 문단을 겨냥한 『맥플레크노(Mac Flecknoe)』입니다. 1676년경 쓰여 필사본으로 돌다가 1682년 무단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표적은 극작가 토머스 섀드웰. 원래 두 사람은 교류가 있었지만, 벤 존슨의 계승 문제와 희극관을 두고 대립했고 이후 정치적으로도 휘그(섀드웰)와 토리(드라이든)로 갈라섰습니다.

설정이 기막힙니다. 졸작의 대명사로 통하던 실존 시인 리처드 플레크노(Richard Flecknoe)가 '어리석음(Nonsense)의 왕국'의 늙은 왕으로 등장해, 자기 후계자로 섀드웰을 지명하고 대관식을 연다는 이야기입니다. 'Mac'은 게일어로 '~의 아들'이니, 제목은 곧 '플레크노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나머지 내 아들들은 가끔 의미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지만,
섀드웰만은 결코 의미 쪽으로 빗나가는 법이 없도다.
— 『맥플레크노』(의역)

이것이 바로 모의 영웅시(mock-heroic)의 기법입니다. 서사시의 장엄한 문체와 형식(왕위 계승, 대관식, 예언)을 시시한 대상에 입혀 그 차이 자체에서 웃음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죠. 이 작품은 훗날 포프의 『우인열전(The Dunciad)』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포프는 사실상 『맥플레크노』를 확대한 '바보들의 서사시'를 쓴 셈입니다.

🌹 로즈 앨리 습격 사건 (1679)
1679년 12월, 드라이든은 코벤트 가든 근처의 로즈 앨리(Rose Alley)에서 괴한들에게 몽둥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당시 돌던 풍자시 「풍자에 관한 에세이(An Essay upon Satire)」의 저자로 그가 의심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실제 작자는 드라이든의 후원을 받던 멀그레이브 백작(John Sheffield)이었다고 여겨지며, 시에서 공격당한 로체스터 백작 등이 배후로 의심받았지만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풍자가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쓰는 장르'였던 시대의 단면입니다.

8. 신앙과 양심 — 개종, 그리고 몰락

⛪ 『평신도의 신앙』(1682)에서 『암사슴과 표범』(1687)으로

1682년 드라이든은 『평신도의 신앙(Religio Laici)』을 발표합니다. 이 시에서 그는 이성만으로는 구원의 진리에 이를 수 없으며, 성경과 교회 전통의 중용을 따르는 영국 국교회의 입장을 옹호했습니다. 이신론(Deism)과 가톨릭, 급진 개신교 모두를 경계하는 중도의 신학시였죠.

그런데 1685년 찰스 2세가 죽고 가톨릭 신자 제임스 2세가 즉위한 뒤, 드라이든은 1685~1686년 무렵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정적들은 또다시 "새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변절"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687년 개종 후의 신앙을 정면으로 변호하는 장편 우화시 『암사슴과 표범(The Hind and the Panther)』을 냅니다.

🦌 암사슴 (Hind)
순백의 암사슴 — 로마 가톨릭 교회. 박해받지만 순결하고 변함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 표범 (Panther)
아름답지만 얼룩진 표범 — 영국 국교회. 진리에 가깝지만 흠이 있는 존재.
🐻 그 밖의 동물들
곰, 늑대, 산토끼 등 여러 동물이 다양한 개신교 분파를 상징합니다.

동물들이 신학을 토론한다는 설정은 당시에도 기묘하다는 평을 받았고, 몬터규(Charles Montagu)와 매슈 프라이어는 이를 패러디한 『시골 쥐와 도시 쥐로 각색한 암사슴과 표범』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는 2,500행이 넘는 장대한 규모로 2행 연구를 신학 논증에 활용한 야심작입니다.

🌊 명예혁명과 계관 박탈 — 끝까지 지킨 선택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도망치고, 개신교도인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즉위했습니다. 새 정부는 공직자에게 새 군주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드라이든은 생애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서약을 거부했고, 가톨릭 신앙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로 1689년 계관시인과 왕실 사료편찬관 직위를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하필이면 『맥플레크노』에서 조롱했던 숙적 토머스 섀드웰에게 돌아갑니다. 문학사에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인사이동이 있을까요?

이 선택은 그를 평생 따라다닌 '기회주의자' 비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진짜 기회주의자였다면 1689년에 다시 개신교로 돌아가 서약하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을 테니까요. 50대 후반의 나이에 연금과 지위를 잃은 드라이든은 다시 펜 하나로 생계를 꾸려야 했습니다.

9. 위대한 번역가 — 생계에서 피어난 마지막 걸작들

🔤 번역 이론: 메타프레이즈·패러프레이즈·이미테이션

드라이든은 1680년 『오비디우스 서간집(Ovid's Epistles)』 번역본 서문에서 번역을 세 유형으로 나눴습니다. 이 구분은 오늘날 번역학 개론서에도 등장하는 고전적 분류입니다.

유형정의드라이든의 평가
메타프레이즈(metaphrase)단어 대 단어, 행 대 행으로 옮기는 직역원작의 정신을 죽이기 쉽다. "족쇄를 차고 줄 위에서 춤추는 것"에 비유
패러프레이즈(paraphrase)원작자의 의미를 놓치지 않되, 표현은 번역 언어에 맞게 자유롭게가장 바람직한 중용의 길
이미테이션(imitation)원작을 출발점 삼아 번역자가 자유롭게 변형·재창작원작자의 이름을 빌린 새 창작에 가깝다고 경계

흥미롭게도 드라이든은 실제 작업에서 점점 더 자유로운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원작자가 "만약 이 시대 영국에 태어났다면 영어로 이렇게 썼을 것"이라는 방식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현지화(localization)'와도 통하는 발상입니다.

🏺 유베날리스와 풍자론(1693)

1693년 그는 로마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와 페르시우스의 풍자시 번역집을 냈습니다(일부는 다른 번역가들과 분담). 앞에 붙인 「풍자에 관한 논고」에서 그는 부드럽게 웃기며 고치는 호라티우스식 풍자와, 분노로 악덕을 내리치는 유베날리스식 풍자를 비교했습니다. 이 논고에서 그는 아서 왕이나 흑태자 에드워드를 주제로 한 영국 서사시를 쓰고 싶었지만 후원이 없어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털어놓습니다. 영웅시의 부활을 이끈 시인이 끝내 자신의 본격 서사시를 쓰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미완의 꿈으로 남았습니다.

🌾 『베르길리우스 작품집』(1697): 영어로 다시 태어난 『아이네이스』

드라이든 번역의 최고봉은 1697년 출간된 『베르길리우스 작품집(The Works of Virgil)』입니다. 『목가(Eclogues)』, 『농경시(Georgics)』, 『아이네이스(Aeneid)』 전체를 영웅 2행 연구로 옮긴 대작입니다. 이 서사시 번역이야말로 사실상 그가 이룬 '영웅시의 부활'의 완성형이었습니다. 직접 서사시를 쓰지 못한 대신, 서구 문학 최고의 서사시 하나를 영어 영웅시로 재창조한 것입니다.

💰 출판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
이 책은 출판업자 제이컵 톤슨(Jacob Tonson)과 함께 예약 구독(subscription) 방식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독자들이 미리 돈을 내고 예약하면, 고액 구독자의 이름과 문장(紋章)을 삽화 아래에 새겨 주는 방식이었죠. 이 사업으로 드라이든은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귀족 한 명의 후원에 의존하던 구조에서, 다수 독자의 선주문으로 작가를 지원하는 구조로 이동하는 흐름을 보여 준 사례입니다. 이후 포프가 호메로스 번역으로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둔 것도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크라우드펀딩과 꽤 닮은 꼴이죠.

톤슨과의 관계는 늘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드라이든은 출판업자가 원고료를 박하게 준다고 투덜댔고, 삽화 속 아이네이아스의 코를 오렌지 공 윌리엄 3세처럼 매부리코로 그려 넣게 했다는 문단의 뒷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진위를 떠나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지 보여 주는 일화입니다.

🎵 성 세실리아 송가와 『알렉산더의 향연』

음악의 수호성인 성 세실리아 축일(11월 22일)을 기념해 런던에서는 매년 음악 송가가 공연되었습니다. 드라이든은 「성 세실리아 축일을 위한 노래(A Song for St. Cecilia's Day)」(1687)와 『알렉산더의 향연, 또는 음악의 힘(Alexander's Feast; or the Power of Music)』(1697)을 썼습니다.

『알렉산더의 향연』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연 잔치에서, 악사 티모테우스가 연주로 왕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이야기입니다. 승리의 자부심, 연민, 사랑, 그리고 복수심까지. 음악에 따라 감정이 바뀌는 흐름을 운율의 길이와 리듬 변화로 직접 구현한 이 작품은 훗날 헨델이 1736년 동명의 오라토리오로 작곡하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드라이든 시의 리듬이 얼마나 '음악적'이었는지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 『고금 우화집』(1700): 초서를 다시 무대로

생애 마지막 해인 1700년, 드라이든은 『고금 우화집(Fables, Ancient and Modern)』을 냅니다. 호메로스, 오비디우스, 보카치오, 그리고 초서의 이야기들을 영웅 2행 연구로 옮겨 다시 쓴 작품집입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초서를 '영시의 아버지'로 부르며, 『캔터베리 이야기』의 다채로운 인물 군상을 두고 "여기에는 신이 주신 풍요(God's plenty)가 있다"는 유명한 찬사를 남겼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초서의 중세 영어는 이미 읽기 어려운 옛말이었고, 운율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드라이든은 초서를 동시대 독자를 위한 현대 영어 시로 되살려, 영문학의 계보가 초서에서 시작해 자신에게까지 이어진다는 전통 의식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자신이 묻힐 곳이 초서의 곁이 된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10. 생애 한눈에 보기

1631 — 8월 9일 노샘프턴셔 올드윙클 출생
1649 — 웨스트민스터 스쿨 재학 중 첫 인쇄 시 발표
1654 —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학사
1659 — 『영웅적 연』 (크롬웰 추모)
1660 — 『아스트라이아 레둑스』 (왕정복고 환영)
1663 —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결혼
1667 — 『아누스 미라빌리스』
1668 — 계관시인 임명, 『극시론』 출간
1670 — 왕실 사료편찬관 겸임
1670–71 — 『그라나다 정복』
1677–78 —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해』
1679 — 로즈 앨리 습격 사건
1681 — 『압살롬과 아히도벨』
1682 — 『메달』, 『맥플레크노』 출간, 『평신도의 신앙』
1685–86 — 가톨릭 개종
1687 — 『암사슴과 표범』
1689 — 충성 서약 거부로 계관시인직 박탈 (후임 섀드웰)
1691 — 퍼셀과 『아서 왕』
1693 — 유베날리스·페르시우스 번역, 풍자론
1697 — 『베르길리우스 작품집』, 『알렉산더의 향연』
1700 — 『고금 우화집』, 5월 1일 런던에서 사망,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코너' 초서 곁에 안장

11. 드라이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유산과 평가

🔗 영문학 계보 속의 위치

영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드라이든은 일종의 '환승역'입니다. 그 앞에는 셰익스피어와 존 던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형이상학파의 대담하고 복잡한 상상력이 있고, 그 뒤에는 포프와 존슨으로 이어지는 18세기 신고전주의(Augustan)의 질서·명료성·이성의 미학이 있습니다. 드라이든은 앞 시대의 활력을 버리지 않으면서 뒷 시대의 규율을 세웠습니다.

⬅️ 이전 세대
셰익스피어, 벤 존슨, 존 던, 밀턴 — 드라이든은 밀턴의 『실낙원』을 각색한 오페라 대본 『순수의 상태(The State of Innocence)』를 쓰며 밀턴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 드라이든
영웅 2행 연구의 표준화, 정치 풍자시와 모의 영웅시, 근대 영어 비평과 산문, 번역 이론
➡️ 다음 세대
포프(『우인열전』, 호메로스 번역), 스위프트, 존슨 — 18세기 영시의 중심 형식은 드라이든이 다듬은 2행 연구였습니다.

📉📈 평가의 부침

18세기에 드라이든은 의심할 여지 없는 대가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가 도래하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 자연을 중시한 낭만주의자들에게 정치와 논쟁의 시, 규칙적인 2행 연구는 '시'라기보다 '운문으로 쓴 산문'처럼 보였습니다.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는 드라이든과 포프를 "우리 산문의 고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사실상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깎아내린 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소설가 월터 스콧은 1808년 18권에 이르는 드라이든 전집을 편집해 그의 문학적 지위를 재조명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T. S. 엘리엇이 1921년 에세이 「존 드라이든(John Dryden)」에서 그를 강력하게 재평가합니다. 엘리엇은 드라이든이 하찮은 것을 위대하게, 평범한 것을 시적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고, 낭만주의적 기준만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은 시를 너무 좁게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학계에서 드라이든은 정치와 문학, 공적 언어와 시의 관계를 고민하게 하는 핵심 작가로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 공적 담론으로서의 시
드라이든에게 시는 골방의 고백이 아니라 광장의 연설이었습니다. 시사 이슈에 형식미를 갖춰 개입하는 그의 방식은 오늘날의 칼럼, 정치 풍자, 사회 비평의 먼 조상입니다.
🔁 형식의 힘
단단한 형식이 오히려 표현을 날카롭게 만든다는 것. 짧은 글자 수 안에서 촌철살인을 노리는 오늘의 카피라이팅·밈 문화와도 통합니다.
🌐 번역과 현지화
"원작자가 지금 여기 태어났다면?"이라는 그의 질문은 콘텐츠 현지화·각색·리메이크 시대에 더욱 유효한 화두입니다.

한 사람이 시인·극작가·비평가·번역가로서 각각 일가를 이룬다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오늘날 재능넷에서 글쓰기, 번역, 각색, 카피라이팅 같은 재능이 저마다 독립된 전문 영역으로 거래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모든 분야를 한 몸에 담아 시대의 표준까지 세운 드라이든의 존재감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 핵심 정리

① 시대의 이름 — 1660~1700년은 '드라이든의 시대'. 왕정복고부터 명예혁명 이후까지 영국 문단의 중심.
② 계관시인 — 1668년 공식 계관시인 임명, 1689년 충성 서약 거부로 박탈. 후임은 숙적 섀드웰.
③ 영웅 2행 연구 — 약강 5보격 두 줄의 각운 쌍을 풍자·서사·번역·연극의 범용 형식으로 완성. 포프에게 계승.
④ 영웅극 — 『그라나다 정복』 등 사랑과 명예의 압운 비극, 이후 무운시 『모든 것은 사랑을 위해』로 전환.
⑤ 풍자 — 『압살롬과 아히도벨』(정치 풍자), 『맥플레크노』(모의 영웅시), 『메달』.
⑥ 비평 — 『극시론』으로 '영국 비평의 아버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 평가.
⑦ 번역 — 메타프레이즈·패러프레이즈·이미테이션 3분법, 『베르길리우스 작품집』으로 영웅시 부활의 완성.
⑧ 유산 — 존슨: "벽돌을 대리석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하락 이후 스콧·엘리엇에 의해 재평가.

#존드라이든#계관시인#영웅2행연구#왕정복고#영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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