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5.0 박범신 소설의 도시 문학적 성격: 산업화 시대 서울로 떠난 사람들과 그들이 마주한 인간 군상

박범신 소설의 도시 문학적 성격: 산업화 시대 서울로 떠난 사람들과 그들이 마주한 인간 군상
이 글에서는 박범신 소설을 '도시 문학'이라는 렌즈로 읽으며, 그가 포착한 산업화 시대의 인간 군상을 시대 배경·인물 유형·공간 구조·문체와 대중성이라는 네 갈래로 정리해 봅니다.
1. 도시 문학이란 무엇이고, 왜 박범신인가
도시 문학은 단순히 도시가 배경으로 나오는 문학을 뜻하지 않습니다. 도시라는 공간이 인물의 의식과 관계, 운명 자체를 규정하는 힘으로 작동할 때 우리는 그 작품을 도시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문학사에서 이 계보는 1930년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천변풍경』, 이상의 「날개」 같은 모더니즘 소설에서 출발해, 전후의 손창섭과 1960년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시 문학의 성격은 결정적으로 바뀝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격화되고, 농촌 인구가 대규모로 수도권으로 이동하며, 서울은 '근대적 감수성의 무대'에서 생존 경쟁과 계층 이동의 전쟁터로 변모했습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등이 모두 이 변동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록했지요.
박범신의 위치는 이 지형에서 독특합니다. 조세희가 우화적이고 압축적인 문체로 계급 구조를 고발하고, 최인호가 도시 청년 문화의 감수성을 포착했다면, 박범신은 농촌 출신 인물이 도시로 올라와 겪는 욕망·좌절·타락·회귀의 서사를 대중이 몰입할 수 있는 장편의 형식으로 끈질기게 반복했습니다. 그는 고향 충남 논산의 기억을 평생 품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도시는 늘 '떠나온 고향'과 짝을 이루는 대립항으로 나타납니다.
모더니즘 도시
산책자의 시선, 경성의 근대 풍경, 지식인의 권태
전후·4·19 이후의 도시
익명성과 고독, 「서울, 1964년 겨울」의 허무
산업화의 도시
이주민, 노동, 계층 상승 욕망, 대중소설과의 결합 — 박범신의 무대
2. 작가의 생애와 도시 체험
박범신은 1946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을 거쳤으며, 교사 생활을 하던 중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며 등단했습니다. 그의 초기 이력에서 주목할 점은 그 자신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주 세대'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품는 열등감과 야망, 도시에 대한 매혹과 혐오는 상당 부분 작가 자신의 체험적 감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연보를 '도시'라는 키워드로 다시 보면 흥미로운 곡선이 그려집니다. 1970~80년대에는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그렸고, 1993년의 절필과 복귀 이후에는 도시에 지친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신자유주의 도시의 구조를 다시 냉정하게 해부했습니다. 즉 박범신의 도시 문학은 한 시기의 유행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산업화에서 후기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반세기를 따라가며 변주된 장기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산업화 시대라는 배경: 소설이 태어난 토양
박범신 소설의 도시성을 이해하려면 1960~80년대 한국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먼저 짚어야 합니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수출 주도형 공업화를 밀어붙였고, 그 과정에서 농촌은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가 되었습니다. 도시 인구 비율은 이 시기에 빠르게 상승했고, 서울은 수백만 단위로 인구가 불어나는 초대형 도시가 되었습니다.
농촌의 젊은 세대가 공장·시장·서비스업 일자리를 찾아 서울과 공업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박범신 인물들의 상경 서사는 이 거대한 인구 이동의 문학적 기록입니다.
1970년대 영동(강남) 개발은 땅값 폭등과 졸부의 탄생을 낳았습니다. '땅'과 '돈'으로 신분이 바뀌는 세계는 박범신 장편의 핵심 무대입니다.
급성장한 도시에는 술집, 호텔, 사채업, 연예 산업이 함께 자랐습니다. 이 '밤의 도시'는 그의 소설에서 욕망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그려집니다.
일간지 연재 장편은 당대 대중의 가장 중요한 읽을거리였습니다. 박범신은 이 매체 환경 속에서 수많은 독자를 만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서울이 '근대의 꿈'과 '악몽'을 동시에 상징했다는 점입니다. 텔레비전과 아파트, 자가용은 성공의 기호였지만, 그 이면에는 판자촌 철거, 장시간 노동, 정치적 억압이 있었습니다. 박범신의 소설은 이 이중성을 개인의 몸과 욕망을 통해 보여 줍니다. 그의 인물들은 국가 정책을 논하지 않지만, 그들의 출세욕과 몰락은 고스란히 시대의 압력을 체현합니다.
4. 대표작으로 읽는 박범신의 도시
4-1.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 중산층의 허기
1970년대 말 신문 연재로 발표되어 큰 인기를 끈 『죽음보다 깊은 잠』은 박범신을 대중 작가로 각인시킨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979년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작품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젊은 남녀의 사랑과 엇갈림을 통해, 물질적 안정과 정서적 공허 사이에서 흔들리는 도시인의 감정을 다룹니다.
이 소설에서 도시는 겉으로 보면 '연애의 무대'지만, 그 사랑은 결혼·직업·계층이라는 현실적 조건과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즉 사랑조차 도시의 교환 체계 안에 놓여 있다는 인식이 작품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1970년대 대중소설이 흔히 '호스티스 소설'이나 통속 멜로로 분류되던 맥락에서, 박범신은 통속적 틀을 빌려 오되 그 안에 도시적 삶의 피로와 상실감을 녹여 넣었습니다.
4-2. 『풀잎처럼 눕다』: 바람에 눕는 사람들
제목부터 김수영의 시 「풀」을 떠올리게 하는 『풀잎처럼 눕다』는 1980년대 초 독자들에게 폭넓게 읽혔습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의 인물들은 시대의 거센 바람 앞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눕는 존재들입니다. 도시의 화려한 표면과 그 아래에서 짓눌리는 개인, 사랑을 지키려다 무너지는 사람들이 중심을 이룹니다.
이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도시 문학적 특징은 '순수'와 '타락'의 이분법입니다. 시골이나 과거의 기억은 순수한 것으로, 도시의 현재는 계산과 배신의 세계로 그려집니다. 이 이분법은 때로 단순하다는 비판도 받지만, 당대 독자들에게는 자신이 떠나온 고향과 지금 살고 있는 도시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정확하게 짚어 주는 장치였습니다.
4-3. 『불의 나라』와 『물의 나라』: 상경 청년의 욕망 서사시
박범신 도시 문학의 정점으로 흔히 꼽히는 작품이 『불의 나라』와 그 후속편 『물의 나라』입니다. 1980년대 중후반 신문 연재로 발표되었고, 『불의 나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주인공 백찬규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맨손으로 성공을 꿈꾸는 청년입니다. 그는 시장 바닥과 뒷골목, 권력과 돈이 얽힌 세계를 거치며 점점 더 큰 판으로 올라가지만, 그 상승은 곧 인간적인 것의 상실을 대가로 합니다.
이 연작이 당시 독자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백찬규는 바로 수많은 독자 자신, 혹은 그들의 형제와 이웃이었습니다. 무일푼으로 상경해 '한 번 출세해 보겠다'는 꿈,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하는 윤리의 선, 그리고 그 선을 넘었을 때 돌아오는 공허. 박범신은 이 서사를 활극에 가까운 속도감으로 풀어내면서도, 주인공이 문득 고향과 어머니, 첫사랑을 떠올리는 장면을 통해 독자의 감정을 붙잡았습니다.
4-4. 1990년대의 단절: 절필과 「흰 소가 끄는 수레」
1993년, 박범신은 신문 연재를 진행하던 중 갑작스럽게 절필을 선언합니다. 인기 작가의 돌연한 붓 꺾기는 큰 화제가 되었고, 그는 이후 대중소설 작가라는 꼬리표, 그리고 자신의 문학에 대한 깊은 회의를 고백했습니다. 몇 해의 침묵 끝에 발표한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이전의 활극적 서사와 확연히 다른, 자기 성찰적이고 내면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도시 문학의 관점에서 이 전환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1980년대까지 박범신의 도시가 '인물이 정복하려는 외부 세계'였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작가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은 시스템으로 바뀝니다. 대중 매체와 시장, 독자의 기대가 만들어 낸 '인기 작가 박범신'이라는 상품에서 빠져나오려는 몸부림 자체가, 도시 자본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증언이 된 셈입니다. 이후의 『더러운 책상』은 작가 자신의 성장과 내면을 정면으로 다루며 만해문학상을 받았습니다.
4-5. 『나마스테』: 세계화 시대 도시의 새 주변인
2005년 출간된 『나마스테』는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카밀과 한국 여성 신우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국 도시와 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그립니다. 1970~80년대 박범신 소설에서 도시의 주변인이 '시골에서 올라온 한국인'이었다면, 2000년대에는 그 자리를 국경을 넘어온 이주민이 차지합니다.
이 변화는 한국 사회가 노동력을 송출하던 나라에서 수입하는 나라로 바뀌었다는 구조적 전환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과거 한국의 농촌 청년이 서울에서 겪던 멸시와 착취를, 이제 한국 사회가 다른 나라 노동자에게 되풀이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작품의 핵심입니다. 즉 『나마스테』는 박범신의 상경 서사가 국제적 규모로 확장된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실제 이주노동자 인권 문제와 집회 장면 등 당대 현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4-6. 『비즈니스』와 『소금』: 자본주의 도시의 해부도
2010년의 『비즈니스』는 개발과 투기로 들썩이는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아들의 사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파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제목 그대로, 이 세계에서는 교육도 사랑도 몸도 모두 '비즈니스'가 됩니다. 이 소설에서 박범신은 서울만이 아니라 서울을 모방하며 팽창하는 지방 중소도시까지 자본의 논리가 스며든 현실을 포착합니다. 산업화 초기의 '고향 대 도시'라는 이분법은 여기서 무너집니다. 고향 자체가 이미 도시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2013년의 『소금』은 가족을 위해 평생 일해 온 아버지가 어느 날 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가족은 그를 '돈 버는 기계'로만 여겨 왔고, 아버지는 소비 사회의 끝없는 요구를 감당하다 결국 탈주합니다. 작품은 자녀들의 소비가 아버지의 노동을 빨아들이는 구조를 '빨대'의 은유로 드러내며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1980년대의 백찬규가 '성공을 위해 도시로 간 아들'이었다면, 『소금』의 아버지는 그 세대가 늙어 도시 소비 체제를 떠받치다 소진된 모습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 시기 | 대표작 | 도시의 얼굴 | 중심 인물 |
|---|---|---|---|
| 1970년대 말 | 『죽음보다 깊은 잠』 | 사랑마저 조건이 되는 도시 | 도시의 젊은 남녀 |
| 1980년대 초 | 『풀잎처럼 눕다』 | 순수를 짓누르는 바람 | 시대에 꺾이는 연인들 |
| 1980년대 중후반 | 『불의 나라』·『물의 나라』 | 욕망이 거래되는 정글 | 상경 청년 백찬규 |
| 1990년대 | 「흰 소가 끄는 수레」, 『더러운 책상』 | 작가 내면을 잠식한 시스템 | 성찰하는 작가적 자아 |
| 2005 | 『나마스테』 | 세계화된 노동 도시 | 이주노동자 카밀 |
| 2010~2013 | 『비즈니스』·『소금』 | 모든 것이 상품인 소비 도시 | 어머니, 아버지 세대 |
5. 박범신이 그린 산업화 시대의 인간 군상
박범신의 소설 세계를 가로지르는 인물들을 유형별로 묶어 보면, 산업화 시대 한국 도시가 어떤 사람들을 만들어 냈는지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아래 유형은 특정 작품 하나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작품에 걸쳐 반복되는 인물상입니다.
🧳 상경한 야심가
시골에서 맨몸으로 올라와 '출세'를 목표로 삼는 청년. 근면과 배짱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폭력·사기·권력과 손잡는다. 『불의 나라』의 백찬규가 전형.
🌙 밤의 도시의 여성
가난과 가족 부양 때문에 유흥가로 흘러든 여성들. 박범신은 이들을 단순한 희생자나 관능의 대상이 아니라 도시 경제의 한 축이자 깊은 내면을 가진 존재로 그리려 했다. 『비즈니스』의 어머니로 이어진다.
💰 졸부와 권력자
땅 투기, 사채, 정치적 연줄로 부를 쌓은 인물들. 주인공이 닮고 싶어 하면서도 증오하는 거울상이다.
🌾 고향에 남은 사람들
어머니, 첫사랑, 옛 친구. 도시 서사 바깥에 있지만 주인공의 양심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존재들이다.
🧑🏭 국경을 넘은 노동자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이주노동자. 과거 한국 상경민이 겪던 소외를 새로운 얼굴로 반복한다.
👨👧 소진된 가장
평생 도시의 노동 체제를 떠받치다 소비 사회에 잠식된 아버지. 『소금』에서 정면으로 다뤄진다.
5-1. 욕망하는 주체: '출세'라는 시대의 종교
박범신 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욕망의 크기입니다. 그들은 소박한 생계 이상의 것을 원합니다. 큰 집, 좋은 차, 사람들의 존경,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는 무시당하지 않을 위치. 산업화 시대 한국 사회에서 '출세'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가치였고, 박범신은 이 욕망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기보다 먼저 그 절박함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가 그린 야심가들은 대개 출발점에서 동정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했고, 멸시받았고, 정당한 방법으로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을 넘는 순간, 독자는 비난과 공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 양가감정의 설계야말로 박범신 대중소설이 단순한 통속극을 넘어선 지점입니다. 독자는 주인공의 몰락을 보며 사회 구조에 대한 질문을 품게 됩니다.
5-2. 몸과 상품: 도시 경제 속 육체
박범신의 소설에는 육체가 자주, 그리고 강렬하게 등장합니다. 노동하는 몸, 거래되는 몸, 폭력에 상처 입는 몸, 늙어 가는 몸. 도시 자본주의가 결국 인간의 몸을 상품으로 바꾸는 체제라는 인식이 그의 작품 전반에 흐릅니다.
『비즈니스』의 어머니가 아이 교육비를 위해 몸을 파는 설정은 충격적이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 '사교육 시장'과 '성 시장'이 같은 논리로 움직인다는 냉혹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소금』의 아버지는 몸이 망가질 때까지 일하는 노동하는 육체입니다. 후기작 『은교』에서는 늙어 가는 육체와 젊음에 대한 갈망이 중심 주제가 되는데, 이 또한 젊음과 생산성을 숭배하는 현대 사회의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5-3. 고향이라는 상처: 회귀할 수 없는 장소
박범신의 도시는 언제나 고향과 짝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 고향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인물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고향의 가난과 정체가 싫어서 떠났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막상 돌아가 보면 고향 역시 개발과 투기로 변해 있습니다.
이 '회귀 불가능성'은 한국 산업화 세대의 정서적 핵심을 건드립니다. 명절마다 귀성 행렬에 오르지만, 그 고향은 점점 낯설어지는 체험. 박범신은 이를 감상적으로 미화하기보다, 떠나온 자의 죄책감과 남은 자의 원망이 엇갈리는 복잡한 감정으로 그려 냅니다. 2010년대 이후 작가가 실제로 고향 논산으로 내려가 집필 생활을 한 것도 이러한 문학적 주제와 맞닿아 있는 행보로 자주 언급됩니다.
6. 공간의 문법: 박범신 소설의 도시 지도
도시 문학을 읽을 때는 '어떤 장소가 어떤 의미를 띠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유용합니다. 박범신의 도시는 몇 개의 상징적 공간으로 구성됩니다.
권력과 자본이 모이는 곳. 주인공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자, 인간성이 가장 철저히 지워지는 장소입니다.
정보와 돈, 몸이 거래되는 회색지대. 박범신 소설에서 많은 사건이 이곳에서 시작되고 꼬입니다.
상경민이 처음 발을 딛는 생존의 공간. 거칠지만 아직 인간적 연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도시 하층민과 노동자, 이주노동자의 거처. 『나마스테』에서 특히 중요하게 그려집니다.
도시 지도 바깥에 있지만, 모든 인물의 마음속에 떠 있는 기준점. 그러나 결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장소입니다.
이 공간 구조는 일종의 수직 이동의 사다리입니다. 인물은 시장통에서 시작해 유흥가를 거쳐 중심부로 올라가려 하고, 그 과정마다 무언가를 버립니다. 반대로 몰락은 이 사다리를 거꾸로 굴러떨어지는 과정입니다. 박범신 소설의 긴장감은 상당 부분 이 공간 이동의 역동성에서 나옵니다.
7. 문체와 대중성: '통속'이라는 평가를 다시 읽기
박범신에게는 오랫동안 '대중소설가', '통속 작가'라는 평가가 따라붙었습니다. 신문 연재의 빠른 전개, 멜로드라마적 감정, 선명한 선악 구도는 문단 일각에서 본격문학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이 평가에 상당한 고뇌를 드러냈고, 1993년 절필은 그러한 갈등이 폭발한 사건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그러나 도시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대중성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그의 소설은 산업화 세대가 실제로 읽은 이야기였습니다. 공장 기숙사와 셋방, 버스와 지하철에서 신문 연재를 따라 읽던 독자들은 소설 속 백찬규에게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둘째, 그의 문체는 감각적이고 리듬감 있는 문장으로 도시의 속도를 체감하게 합니다. 화려한 수사와 직설적 감정 표현은 1980년대 도시의 과잉된 에너지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① 서사 속도 — 사건 중심의 빠른 전개는 도시의 숨 가쁜 리듬을 재현하지만, 인물 내면의 섬세한 묘사를 희생시키기도 했습니다.
② 감정의 직접성 — 사랑·분노·회한을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방식은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 냈고, 동시에 '감상적'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③ 낭만적 리얼리즘 — 사회 현실을 그리되 낭만적 열정과 비극적 운명의 틀로 감싸는 방식. 평론가들은 이를 박범신 특유의 미학으로 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1990년대 이후의 박범신은 스스로 이 긴장을 작품의 주제로 끌어들였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가가 그 사랑 때문에 소진되는 구조는, 문화 산업이 고도화된 도시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웹소설이나 콘텐츠 창작자들이 겪는 '인기와 소진'의 문제를 떠올리면, 박범신의 고민은 꽤 현재적입니다. 창작 재능을 거래하고 나누는 재능넷 같은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에게도 '시장이 원하는 글'과 '내가 쓰고 싶은 글' 사이의 균형은 여전히 낯설지 않은 질문일 것입니다.
8. 동시대 작가들과의 비교
박범신의 도시 문학적 성격은 같은 시대 작가들과 나란히 놓을 때 더 또렷해집니다.
| 작가 | 대표작 | 도시를 보는 방식 | 박범신과의 차이 |
|---|---|---|---|
| 조세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재개발과 노동 착취를 우화적·단문의 문체로 고발 | 박범신은 계급 구조를 개인의 욕망 서사로 풀어냄 |
| 최인호 | 『별들의 고향』 | 도시 청년 문화와 여성의 비극을 감각적으로 포착 | 박범신은 상경 남성의 상승·몰락 서사에 더 집중 |
| 황석영 | 「객지」, 「삼포 가는 길」 | 떠도는 노동자와 사라지는 고향을 리얼리즘으로 | 박범신은 장편 대중서사로 도시 내부 권력 세계까지 진입 |
| 윤흥길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소시민의 자존심과 빈곤을 아이러니로 | 박범신은 아이러니보다 열정과 비극을 택함 |
| 조선작 | 『영자의 전성시대』 | 도시 하층 여성의 삶을 거칠게 드러냄 | 박범신은 하층에서 상층까지 수직적 공간을 폭넓게 다룸 |
이 비교에서 보이듯, 박범신의 고유한 자리는 '욕망의 상승선'을 끝까지 따라가는 장편 서사에 있습니다. 많은 작가가 도시의 하층과 주변부에 머물며 소외를 그렸다면, 박범신은 주인공을 권력의 중심부까지 밀어 올린 뒤 그곳에서 무너뜨림으로써, 성공 자체가 해답이 아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9. 박범신 도시 문학의 의의와 한계
· 이촌향도 세대의 집단적 경험을 대중적 서사로 기록
· 욕망을 단죄하기보다 그 사회적 기원을 드러냄
· 1970~2010년대에 걸쳐 도시의 변화를 장기적으로 추적
· 이주노동자 등 새로운 주변인을 일찍이 문학의 중심에 세움
·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
· 고향=순수, 도시=타락이라는 이분법의 단순성
· 멜로드라마적 감상성과 과잉된 수사
· 여성 인물을 남성 주인공의 욕망 서사에 종속시킨다는 비판
· 사회 구조 분석보다 개인 운명에 의존하는 결말
특히 여성 인물 재현의 문제는 오늘날 다시 읽을 때 꼼꼼히 따져 봐야 할 부분입니다. 그의 소설 속 여성들은 종종 순결한 고향의 연인이거나 도시의 유혹적 존재로 나뉘는 경향을 보입니다. 다만 『비즈니스』처럼 후기작에서는 여성 인물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전면에 나서는 변화도 관찰됩니다. 이러한 변화의 궤적을 따라 읽는 것 자체가 한국 도시 문학의 젠더 감수성 변화를 살피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10. 오늘의 독자에게 박범신의 도시가 말하는 것
지금의 서울은 박범신이 처음 그렸던 서울과 많이 다릅니다. 판자촌은 거의 사라졌고, 시장통 자리에는 고층 주상복합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던진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부동산과 계층 이동에 대한 집착,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사교육과 소비 경쟁,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불의 나라』의 백찬규가 오늘 태어났다면 아마 부동산 경매나 코인 투자, 혹은 플랫폼 노동의 세계에서 성공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금』의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 주변의 수많은 가장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범신의 소설은 '지나간 산업화 시대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현재 진행형인 도시의 초상입니다.
시대 — 1970~80년대 산업화와 이촌향도, 2000년대 이후 세계화와 소비사회
핵심 서사 —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 인물의 상승과 몰락,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인간 군상 — 상경한 야심가, 밤의 도시의 여성, 졸부와 권력자, 이주노동자, 소진된 가장
공간 — 시장통·유흥가·중심부로 이어지는 수직 사다리와 그 바깥의 고향
미학 — 빠른 서사와 감정의 직접성, 낭만적 리얼리즘
의미 — 산업화 세대의 집단 정서를 대중의 언어로 남긴 한국 도시 문학의 중요한 한 축
박범신을 처음 읽는다면 『불의 나라』로 1980년대 서울의 열기를 체감하고, 『나마스테』로 그 열기가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확인한 뒤, 『소금』으로 그 모든 질주가 남긴 피로를 들여다보는 순서를 권합니다. 세 작품을 이어 읽으면, 한 작가가 반세기 동안 붙잡고 있었던 질문, 곧 "도시는 우리에게서 무엇을 가져갔고,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물음이 선명하게 떠오를 것입니다. 고전 반열에 오른 한국 문학을 새롭게 읽고 해설하는 재능 역시 재능넷 지식인의 숲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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