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대표 이미지 - 루쉰의 청년론 — "신청년"에 걸었던 기대와, 그 뜨거운 계몽의 온도

루쉰의 청년론 — "신청년"에 걸었던 기대와, 그 뜨거운 계몽의 온도

고전문학 · 중국 문학 시리즈

광인일기철방(鐵屋)救救孩子孺子牛

들어가며: "청년"이라는 단어가 무기였던 시절

자, 친구야. 오늘은 조금 무거워 보이지만 사실 엄청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나 풀어볼게.
바로 루쉰(魯迅, 1881~1936)이 "청년"을 어떻게 바라봤는가 하는 이야기야.

지금 우리가 "청년"이라고 하면 뭐가 떠올라? 취업, 자취방, N잡, 번아웃… 대충 이런 거지.
그런데 100여 년 전 중국에서 "청년(靑年)"은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가진 단어였어.
그건 낡은 제국을 부수고 새 나라를 세울 유일한 희망을 가리키는 말이었거든.

1915년 9월, 천두슈(陳獨秀)가 상하이에서 잡지 하나를 창간해.
처음 이름은 《청년잡지(靑年雜誌)》, 이듬해부터 이름을 바꿔서 그 유명한 《신청년(新靑年)》이 되지.
이름부터가 선언이야. "새로운 청년". 즉 낡은 청년은 이제 그만이라는 뜻.

그리고 이 잡지의 1918년 5월호(4권 5호)에, 중국 최초의 현대 백화문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이 실려.
바로 〈광인일기(狂人日記)〉.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루쉰'이라는 필명이 세상에 나와.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저장성 사오싱 출신,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중퇴자.
의사가 되려다가 "몸을 고치는 것보다 정신을 고치는 게 먼저다"라고 결론 내리고 붓을 든 사람이지.

루쉰과 '신청년'의 시간선 1915 청년잡지 창간 1918 광인일기 1919 5·4 운동 1926 3·18 참사 1927 광저우의 충격 1930 좌련 결성 기대 → 절규 → 회의 → 그럼에도 다시 손을 내밀기 루쉰의 청년론은 '일직선'이 아니라 '굽이치는 선'이다

1. 철방(鐵屋) 비유 — 잠든 사람을 깨우는 게 옳은 일일까?

루쉰 청년론의 출발점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장면을 봐야 해.
첫 소설집 《납함(吶喊)》(1923) 서문에 나오는, 친구 첸쉬안퉁(錢玄同)과의 대화야.

루쉰: "쇠로 만든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 하나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에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곧 숨이 막혀 죽을 거야.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죽으니 죽음의 슬픔은 못 느끼지.
그런데 자네가 크게 소리쳐서 비교적 정신이 든 몇 사람을 깨운다면?
그 불행한 소수에게 구제할 수 없는 임종의 고통만 안겨주는 거잖아. 그게 미안한 일 아닌가?"

첸쉬안퉁: "그래도 몇 사람이 깨어난다면, 그 쇠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나?"

이 한 마디에 루쉰이 설득당해서 글을 쓰기 시작해.
자, 여기서 핵심 포인트 잡아보자.

① 루쉰은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부술 수 없는 쇠방"을 전제로 깔았어.

② 그럼에도 글을 썼다. "희망이 없다"는 것도 증명 못 하니까.

③ 깨어날 '몇 사람' — 루쉰이 상정한 독자가 바로 청년이었어.

그러니까 루쉰의 계몽은 처음부터 "확신에 찬 스승의 훈계"가 아니라,
"죄책감을 품고 내지르는 외침"이었다는 거야. 이게 진짜 중요한 차이야.

2. "아이를 구하라(救救孩子)" — 〈광인일기〉의 마지막 문장

〈광인일기〉의 줄거리는 알지? 피해망상에 빠진 한 남자가
역사책을 들여다보니 온 페이지에 '인의도덕(仁義道德)'이 적혀 있는데,
밤새 자세히 들여다보니 글자 사이사이에서 딱 두 글자가 튀어나와.
"흘인(吃人)" — 사람을 잡아먹는다.

4천 년 유교 문명의 역사를 식인의 역사로 규정해버린, 그야말로 폭탄 같은 선언이었어.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바로 그거야.

"아이를 구하라…(救救孩子……)"

왜 '아이'일까? 어른은 이미 식인 문화를 먹고 자랐으니까.
광인 자신도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을 몇 점 먹었을지 모른다"고 고백하잖아.
기성세대는 이미 오염됐다는 인식. 그래서 남은 건 아직 오염되지 않은 세대뿐이야.

이게 루쉰 청년론의 기본 구조야. 재미있게 표현하면 이런 식이지.

구분루쉰의 시선키워드
노인·기성세대식인 문화의 담지자, 스스로는 못 벗어남낡음 · 관습 · 체면
청년·아이아직 구할 수 있는 존재, 미래의 가능성새로움 · 생명력
루쉰 자신중간에 낀 '역사적 중간물(歷史的 中間物)'과도기 · 희생

여기서 '역사적 중간물'이라는 개념이 정말 루쉰다워.
그는 자기를 '미래를 여는 영웅'으로 놓지 않았어.
오히려 "나는 낡은 진영에서 나왔기에 낡은 병을 안고 있다"고 계속 말했거든.
자기 세대는 다리 역할만 하고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거야.

3. "어깨로 어둠의 갑문을 떠받쳐라" — 가장 유명한 선언

1919년 11월, 《신청년》 6권 6호에 루쉰이 논문 하나를 실어.
제목이 아주 도발적이야. 〈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인가(我們現在怎樣做父親)〉.

전통 중국의 '효(孝)' 관념을 정면으로 깨는 글이었어.
부모가 자식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으라는 논리를 거부하고,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그리고 여기에 루쉰 청년론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 나와.

"스스로 인습(因襲)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둠의 갑문(閘門)을 어깨로 떠받쳐서,
아이들을 넓고 밝은 곳으로 내보내
이후로 행복하게 살고 도리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라."

와… 이거 이미지가 진짜 강렬하지 않아?
어두운 수문이 쾅 내려오려는데, 어른이 자기 어깨로 그걸 버티고 서 있는 거야.
그 틈으로 아이들이 빛을 향해 달려 나가고, 어른은 결국 깔려 죽는 그림.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 계몽. 이게 루쉰식 어른의 역할이었어.
요즘 말로 하면 "나는 못 나갔지만 너는 나가라, 문은 내가 잡고 있을게" 이런 거지.
근데 이거 진심으로 실천하려면… 솔직히 쉽지 않잖아?

덧붙임 — 같은 해 루쉰은 〈수감록(隨感錄) 41〉에서 이렇게 썼어.
"한 푼의 열이 있으면 한 푼의 빛을 내라(有一分熱, 發一分光)."
반딧불처럼 작은 빛이라도 어둠 속에서는 빛이니,
꼭 횃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이 문장, 지금도 중국 교과서와 졸업식 연설에 계속 등장하는 국민 문장급이지.

4. 청년에게 던진 '냉수 한 바가지' — 노라와 필독서 논쟁

4-1.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1923)

1923년 12월, 루쉰은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강연을 해.
주제는 입센의 《인형의 집》. 당시 중국 청년들 사이에서 '노라 열풍'이 대단했거든.
집을 박차고 나가는 노라 = 봉건 가정을 탈출하는 신여성·신청년의 아이콘이었지.

그런데 루쉰이 강연에서 한 말이 뭐였게?

"노라가 집을 나간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길은 둘뿐이다. 타락하거나, 아니면 돌아오거나."

"꿈에서 깨어나 갈 길이 없다면, 차라리 깨우지 않는 게 낫다."

청년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 완전 김 빠지는 얘기잖아.
근데 루쉰의 논리는 냉정하게 현실적이었어.
해방을 외치려면 경제권(經濟權)이 먼저라는 거야.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참정권보다 주머니 사정이 급하다.
그리고 "가정에서 남녀가 똑같이 재산 분배를 받아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해.

이건 계몽에 대한 자기 성찰이었어.
구호만 던지고 현실적 조건을 안 만들어주는 계몽은 오히려 청년을 낭떠러지로 민다는 것.
100년 지난 지금도 유효한 말 아니야? "꿈을 좇아라"라고만 말하는 어른들 많잖아.

4-2. 〈청년필독서〉 사건(1925)

1925년 초, 베이징의 《경보부간(京報副刊)》이 유명 학자들에게 설문을 돌려.
"청년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권을 추천해 주세요."

다른 학자들은 성실히 고전 목록을 적었는데, 루쉰은 추천란에 이렇게 써버려.

"나는 지금까지 유의해 본 적이 없어서 지금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비고란에 — "나는 중국 책을 적게 읽거나 아예 읽지 말고,
외국 책을 많이 읽으라고 생각한다.
중국 책을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외국 책을 읽으면 인생에 접촉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어진다."

난리가 났지. 국수주의자들한테 엄청 욕먹었어.
물론 루쉰 본인은 중국 고전에 정통한 사람이었어. 《중국소설사략》을 쓴 사람이잖아.
《고소설구침》 같은 고적 정리 작업도 엄청나게 했고.
그러니까 이건 "고전을 없애자"가 아니라,
"청년이 죽은 책에 파묻혀 행동력을 잃는 걸 막자"는 전략적 발언이었어.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산 채로 매장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봤거든.

5. 피로 쓴 글 — 3·18 참사와 류허전

'철방(鐵屋)' 비유 인포그래픽 창문 없는 쇠방 잠든 다수 / 깨어난 소수(노랑) 깨우면? 임종의 고통 = 계몽의 잔혹함 안 깨우면? 확실한 죽음 = 희망의 완전 소멸 루쉰의 선택 : "없다고도 증명 못 하니, 일단 외친다"

루쉰의 청년론이 가장 아프게 드러난 순간은 1926년 3월 18일이었어.
베이징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돤치루이(段祺瑞) 집정부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총격을 당해.
수십 명이 죽었고, 그중에 루쉰이 가르치던 베이징여자사범대학 학생
류허전(劉和珍)과 양더췬(楊德群)이 있었어.

루쉰은 그날을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고 썼고,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記念劉和珍君)〉라는 명문을 남겨.
중국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단골 지문이야.

"진정한 용사는 참담한 인생을 감히 직시하고, 뚝뚝 흐르는 선혈을 감히 정시(正視)한다."

"묵묵히 있는 가운데 폭발하지 않으면, 묵묵히 있는 가운데 멸망할 뿐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정말 루쉰다운 부분은 따로 있어.
그는 청년들에게 함부로 목숨을 걸지 말라고도 말해.
"맨손으로 청원하는 방식"에 대해 회의를 표하면서,
청년의 피가 너무 값싸게 소비되는 것을 아파했지.
즉 그는 청년을 선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키고 싶어 한 사람이었어.
이 글을 쓴 뒤 수배 명단에 올라 피신 생활을 하고, 결국 그해 베이징을 떠나 남쪽으로 가.

6. 1927년 광저우 — 진화론이 '폭삭' 무너진 날

여기가 루쉰 청년론의 최대 분기점이야. 진짜 중요한 대목이니까 집중.

루쉰은 원래 단선적 진화론을 믿었어.
"미래는 과거보다 낫고, 청년은 반드시 노인보다 낫다."
이게 그의 기본 신념이었지. 젊음 = 진보라는 등식.

그런데 1927년, 그는 광저우 중산대학(中山大學) 교무주임으로 있었어.
그해 4월 12일, 상하이에서 국민당의 반공 쿠데타(4·12 정변)가 벌어지고
광저우에서도 4월 15일에 대대적인 검거가 일어나.
루쉰은 긴급회의를 열어 체포된 학생들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해.
그리고 그는 청년이 청년을 밀고하고, 청년이 청년을 죽이는 광경을 목격해.

《삼한집(三閑集)》 서문 중 —
"나는 광저우에서 같은 청년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혹은 밀고하고 혹은 관청을 도와 사람을 체포하는 것을 목격했다.
나의 사상은 이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轟毀)."

"청년은 무조건 선(善)하다"는 믿음이 박살난 거지.
그는 이후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상하이로 떠나.
이 사건 이후 루쉰의 글은 확실히 달라져.
나이가 아니라 '위치'와 '선택'이 사람을 결정한다는 쪽으로 이동하는 거야.

시기청년을 보는 관점대표 텍스트
1918~1925진화론적 낙관 — 청년은 노인보다 낫다광인일기, 수감록,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1923~1926조건에 대한 성찰 — 경제·현실 없는 각성은 위험노라는 떠난 후, 청년필독서
1927 이후계급·입장 중심 — 나이보다 '어느 편에 서느냐'삼한집 서문, 이심집
1930~1936실천적 후원자 — 직접 키우고, 먹이고, 출판해줌좌련 활동, 목판화 운동

재미있는 건, 이렇게 크게 실망했는데도 그가 청년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야.
보통 사람 같으면 "젊은 것들 다 똑같아" 하고 등 돌렸을 텐데,
루쉰은 오히려 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청년을 도왔어. 다음 장에서 볼게.

7. 말이 아니라 행동 —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겠다"

루쉰의 청년론이 그냥 '멋진 말'로 끝났다면 이렇게까지 기억되진 않았을 거야.
그는 상하이 시기(1927~1936)에 진짜로 청년들의 뒤를 봐줬어. 목록을 볼까?

① 좌련(左聯)과 다섯 젊은 순국자

1930년 3월, 상하이에서 중국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고 루쉰은 발기인이자 상무위원으로 참여해.
1931년 2월, 러우스(柔石)·후예핀(胡也頻)·인푸(殷夫)·리웨이썬·펑컹 등
이른바 '좌련 5열사'가 룽화에서 총살당해.
루쉰은 〈망각을 위한 기념(爲了忘卻的記念)〉을 써서 이들을 추모하면서
"나는 청년의 피로 목까지 잠겨 숨 쉬기 어렵다"는 취지의 절규를 남기지.

② 목판화(木刻) 운동의 대부

1931년 8월, 루쉰은 상하이에서 목각강습회를 열어.
일본인 강사를 초빙하고 통역까지 직접 하면서 젊은 미술학도들을 가르쳐.
독일의 케테 콜비츠, 소련 판화가들의 작품집을 사비로 수입해 소개했고,
《케테 콜비츠 판화 선집》을 직접 편집·출판했어.
왜 판화였을까? 값싸고, 빠르고, 대량 복제가 되니까.
가난한 청년 예술가가 곧바로 대중과 만날 수 있는 매체였던 거지.
오늘날 중국 현대 판화의 출발점을 루쉰으로 잡는 이유가 여기 있어.

③ 무명 청년 작가들의 '든든한 뒷배'

동북에서 피난 온 무명 청년 샤오쥔(蕭軍)과 샤오훙(蕭紅)이
1934년 상하이로 와서 루쉰에게 편지를 보내. 루쉰은 직접 만나주고, 밥을 사주고,
샤오훙의 《삶과 죽음의 자리(生死場)》, 샤오쥔의 《8월의 향촌》에 서문을 써서
'노예총서'로 출판까지 밀어줘. 두 사람은 단숨에 중국 문단에 데뷔하지.
또 러시아 문학 번역가 취추바이, 청년 편집자 웨이쑤위안, 리지예 등
그가 뒤를 봐준 청년의 명단은 끝이 없어.

1932년 시 〈자조(自嘲)〉 중 —
"횡미냉대천부지(橫眉冷對千夫指) / 부수감위유자우(俯首甘爲孺子牛)"
눈썹 치켜들고 천 사람의 손가락질을 차갑게 마주하되,
고개 숙여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이 두 구절이 루쉰 인생의 요약본이야.
적에게는 얼음, 다음 세대에게는 등을 내주는 소.
말로만 "청년이 희망"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등을 내줬다는 거.

8. 그래서 루쉰은 희망을 믿었을까?

이 질문이 제일 재밌어. 답은 "믿지도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야. 모순 같지?

산문시집 《들풀(野草)》(1927 출간)의 〈희망〉 편에서
그는 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말을 인용해.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한 것처럼."
(絶望之爲虛妄, 正與希望相同)

이 문장, 처음 보면 무슨 말장난 같은데 곱씹으면 소름 돋아.
"희망은 헛되다" 다음에 "절망도 똑같이 헛되다"를 붙여버린 거잖아.
그러니까 희망이 없다고 드러눕는 것도 근거 없는 짓이라는 뜻이야.
결국 남는 건 "그래도 걸어가는 것"밖에 없어.

그래서 단편 〈고향(故鄕)〉의 저 유명한 결말이 나오는 거고.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여기서 '걸어가는 사람'이 누구겠어? 맞아, 청년들이지.
루쉰의 희망은 보장된 미래가 아니라 발자국의 축적이었던 거야.

그리고 《들풀》의 〈과객(過客)〉에는 정처 없이 걷는 나그네가 나와.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노인은 "무덤"이라 하고, 소녀는 "들꽃"이라 해),
쉬고 싶지만 앞에서 자꾸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계속 걸어.
이게 루쉰이 생각한 지식인과 청년의 실존이야.
목적지가 확실해서 걷는 게 아니라, 멈출 수 없어서 걷는 사람.

9. 오해 정리: 루쉰은 "청년 무조건 찬양론자"가 아니다

여기서 팩트 체크 한번 하고 갈게. 흔한 오해들이 좀 있거든.

오해 1. "루쉰은 청년은 다 옳다고 했다."
→ 아니야. 1927년 이후 그는 "청년도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직접 목격하고 인정했어.
말년에는 "청년이라고 다 같은 청년이 아니다, 깨어 있는 청년과 잠든 청년이 있다"는 취지로 자주 구별했지.

오해 2. "루쉰은 전통을 전면 부정했다."
→ 절반만 맞아. 그는 《중국소설사략》(1923~24)을 쓴 최고 수준의 고전 연구자였고,
한(漢)나라 화상석 탁본 수집가였으며 고적 교감에 엄청난 시간을 들였어.
그가 친 건 '전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잡아먹는 예교(禮敎) 시스템이었어.

오해 3. "루쉰은 항상 청년에게 다정했다."
→ 그럴 리가. 그는 논쟁의 왕이었어. 현대평론파, 신월파, 심지어 좌련 내부 인사들과도
가차 없이 싸웠지. 잡문(雜文)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의 '싸움용 단검'이었으니까.
다만 그 날카로움이 무명의 가난한 청년에게는 거의 향하지 않았다는 게 포인트야.

루쉰의 유서에 남은 한 줄

1936년 10월 19일, 루쉰은 상하이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 향년 55세.
장례식 때 관을 덮은 천에는 세 글자, "民族魂(민족혼)"이 적혀 있었어.
그가 죽기 한 달여 전 쓴 〈죽음(死)〉에 남긴 유언 조항 중엔 이런 것들이 있어.

"아이가 자라서 재능이 없으면 작은 일을 찾아 먹고살게 하고,
절대로 공허한 문학가나 미술가가 되게 하지 말라."
"남의 이빨과 눈을 손상시켜 놓고 보복에 반대하며 관용을 주장하는 자들을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

마지막까지 루쉰다워. 낭만적 허세를 경계하고, 위선적 화해를 거부하고.
그가 청년에게 바란 건 화려한 이상가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실무형 인간이었던 거야.

10. 2020년대의 우리에게 — 루쉰 청년론이 아직 유효한 이유

자, 이제 정리해보자. 루쉰의 청년론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면 대충 이래.

루쉰의 명제오늘의 번역
어둠의 갑문을 어깨로 떠받쳐라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일을 해야 한다
노라는 경제권이 필요하다구호가 아니라 물적 조건이 자유를 만든다
한 푼의 열이 있으면 한 푼의 빛을대단하지 않아도,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된다선례가 없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절망도 희망만큼 허망하다냉소는 낙관만큼이나 근거 없는 태도다

특히 마지막 항목, 요즘 진짜 와닿지 않아?
"어차피 안 돼"라는 말이 제일 쿨해 보이는 시대잖아.
그런데 루쉰은 100년 전에 이미 "냉소도 게으른 믿음일 뿐"이라고 찔러놨어.

그리고 또 하나. 루쉰의 계몽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그가 자기 자신을 계몽의 예외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는 "나 역시 식인의 역사를 먹고 자랐다"고 인정했고,
"나 같은 사람은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어.
이런 자기부정이 있었기에 그의 청년론은 꼰대의 훈화가 아니라 동행의 언어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사실 루쉰이 청년에게 해준 일의 본질을 한 단어로 줄이면 '연결'이야.
번역해서 세계 문학을 연결하고, 판화 기법을 가르쳐 기술을 연결하고,
무명 작가에게 서문을 써서 독자와 연결해줬지.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건네주는 구조 —
오늘날 재능넷 같은 재능 공유 플랫폼이 하는 일도 결국 같은 결이야.
100년 전엔 우편과 목판 인쇄로, 지금은 온라인 연결로 형태만 바뀐 셈이지.

더 읽어볼 텍스트 가이드

입문용 — 〈광인일기〉, 〈고향〉, 〈아Q정전〉 (소설집 《납함》)
청년론 핵심 — 〈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인가〉,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내면 탐구 — 《들풀》의 〈희망〉, 〈과객〉, 〈그림자의 고별〉
격정적인 산문 —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 〈망각을 위한 기념〉
자기 성찰 — 《납함》 서문, 《삼한집》 서문

혹시 처음이라면 《납함》 서문부터 읽어봐.
열 페이지 남짓인데, 루쉰이라는 사람이 왜 글을 쓰게 됐는지가 통째로 들어 있어.
그리고 다 읽고 나면 아마 이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거야.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아무 길 없는 데를 걷고 있는 너에게,
100년 전 사오싱 출신 아저씨가 보내는 응원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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